교육과 전도·선교운동을 민족운동으로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완> 11. 정재면 <3> 민족독립운동가·교육자·목회자
작성 : 2019년 04월 30일(화) 08:00 가+가-

1913년 항일운동단체인 간민회 조직을 위한 총회 소집 통지서. 북간도 교민에게 애국심을 고취함으로써 독립운동기반 조성에 기여한다는 취지가 드러나 있다. 정재면을 비롯한 이동춘 등의 발기인 명단이 들어있다. /출처 독립기념관

연해주, 상해, 북간도 전 지역을 순회하며 독립전쟁 현장에서 활동하던 정재면 전도사는 일제의 간도출병 이후 용정으로 돌아와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했다. 영국조계지 용정에 캐나다장로교선교부가 세운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는 그 이름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정신 아래 명동학교의 전통을 이어 민족혼을 교육하는 기독교민족주의 학교였다. 은진학교는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교사로 봉직했고,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석권하여 친일 만주국을 세울 때까지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게양한 민족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1925년 김약연의 명동중학이 폐쇄되자 그 재학생 전부를 받아들여 민족교육을 이어가도록 했고 이때 정재면은 김약연을 명동에서 용정으로 이주하도록 권유하고 김약연은 은진중학 이사장에 취임했다. 또한 정재면은 학생, 청년을 중심으로 동만주청년체육대회를 수차례 개최하여 체육을 통한 청년, 학생들의 민족단결을 촉구했고, 구제사업을 통해 이준 열사의 가족을 형제처럼 돌보는 등 순국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보살폈다.

한편, 정재면은 함북노회에 신학생청원서를 제출한지 8년만인 1925년 41세의 나이로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 신학부에 유학하여 1927년까지 수학했다. 금릉대학에서 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정재면은 이듬해 1928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 후 1929년 제24회로 졸업했다. 이는 해외에서 신학을 공부한 학생은 1년 과정으로 졸업하도록 한 장로교총회 규정에 의한 것이었다. 재학 때 그는 학생회장으로 활약했으며, 레이놀즈(W. D. Reynolds, 이눌서(李訥瑞)) 교수와 함께 중국인 치아유밍(賈玉銘)이 한문으로 번안한 찰스 하지(charles Hodge)의 '조직신학'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이는 평양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정재면은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29년 은진학교 교목으로 봉직하게 되었다. 이때 정재면은 민족의 독립과 평화를 뜻하는 잡지 '비닭기'를 간행하여 학생, 청년, 주민, 교인들을 계몽해 나갔다. 정재면에게 민족주의 잡지, 신문은 북간도 민족운동을 진행하는데 주요한 도구였는데 이를 통해 교인, 학생, 주민들에게 세계 정세를 읽히고 독립운동 상황을 알리는 등 민족계몽운동을 이어갔다. 용정 이주 초기부터 그는 미주 한인사회와 민족단체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로 1909년에 창간된 '신한민보'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의 기관지로 1912년에 창간된 '권업신문'을 북간도 각지에 보급했다. 또한 상해임정의 만주 대표부 역할을 한 4.1상회를 통해 상해판 '독립신문'의 배포와 발간을 위한 재정지원, 명동과 정동 학생들에 의해 발간된 '자유의 종', '우리들의 편지' 등의 발간과 보급을 위해 재정을 모금하고 지원했다. 이러한 민족주의 잡지, 신문의 발간, 보급, 재정지원 활동을 통해 볼 때, 정재면이 이끈 북간도 일대의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은 지역 운동으로 국한되지 않고 국내 및 세계에서 진행되던 민족운동과 꾸준히 연대해 나간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1930년 2월에 간도에 1927년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중심으로 한 국내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이 전해지고, 북간도 학생운동도 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는 민족주의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운동도 함께 나타났는데, 두 운동은 독립을 위한 협력과 방법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1925년부터 28년까지 간도지역에도 중국 공산당의 영향으로 간도공산당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영향으로 1930년 북간도 지역의 청년들 중심으로 공산당 운동도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북간도 민족독립운동을 이끌고 있던 김약연과 정재면은 러시아, 일본, 중국의 공산당의 사회혁명이 자국의 이익과 관계없이 한민족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생각과 명목을 비판하며, 민족운동은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으로 이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1931년 정재면 목사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용점을 거점으로 하는 민족운동 전개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함경북도로 옮겨온다. 소속도 동만노회에서 함북노회로 이명한 정재면 목사는 일제의 감시로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기 보다는 이후 목회활동에 집중했다. 1931~1935년까지 청진의 모교회 신암동(新岩洞)교회를 섬겼고, 1935년에 관북의 모교회인 원산의 광석동(廣石洞)교회로 옮겼다. 광석동교회는 그가 북간도로 가기 전에 설립하고 교사로 봉직한 보광학교와 관련 있는 곳이며 간도교회 개척자 다수가 배출된 교회이기도 했다. 일제는 정재면 목사가 광석동교회를 중심으로 음악과 문화 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펼치자 노회에 압력을 가하여 그의 사임을 요구했고, 마침내 1943년 그는 안변의 작은 교회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2차 세계대전 말기 제국전쟁 수행에 종교계를 이용할 목적으로 1944년 12월에 '조선전시종교보국회(朝鮮戰時宗敎報國會)'를 결성하고 이에 반하는 민족주의 목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정재면 목사도 연루되어 이규용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영흥경찰서, 고흥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1945년 8월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 후 그는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에 참여했으나 협의회가 개인을 옹호하는 정파로 전락하자 탈퇴하고 현실정치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1947년 토마스목사기념전도사업회 편집부장으로 시무하다가 곧이어 해방 후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언론이었던 '기독교공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에 뛰어들었다.

해방 후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저술과 목회활동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막대한 분량의 '북간도독립운동사'를 집필했으나 간도 독립운동 연구의 사료적 가치가 높은 이 자료는 안타깝게도 현재 분실되어 남아있지 못하다. 그는 송파중앙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시무하다가 1962년 79세로 타계하였다. 그는 일생을 통해 신앙의 사회적 참여를 강조하며 교육과 전도와 선교운동을 민족운동으로 드러낸 민족독립운동가, 교육가, 그리고 목회자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상도 교수 / 호남신학대학교, 역사신학


#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난해 9월부터 남강 이승훈을 시작으로 총 11명의 인물을 소개해 온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이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각 인물을 집필해주신 7분의 필자분들과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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