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이남 최초의 3.1만세운동, 신앙 통해 시대의 위기 극복
(8)군산지역
작성 : 2019년 05월 01일(수) 08:03 가+가-

군산은 호남지역 최초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무엇보다 군산의 만세운동이 선교사들이 세운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예수병원 직원과 교회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됐다는 점은 특히 눈길을 끈다.


 【 군산=최은숙 기자】군산은 호남지역 최초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무엇보다 군산의 만세운동은 선교사들이 세운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예수병원 직원과 교회 신도들을 주축으로 진행됐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당시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교사들과 예수병원의 직원들은 모두 기독교인으로 신앙을 통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전형적인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군산에서 만난 강무순 목사(성원교회)는 "교사들의 항일정신이 학생들에 충분히 계승되고 고취되었기 때문에 군산의 3.1만세운동을 이끌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산의 3.1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주역인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등은 미국 남장로교회 7명의 선교사들로 시작됐다. 1892년 입국한 선교사들은 군산과 전주 등 호남지역 답사를 진행하면서 호남선교부로 '군산'을 선택했다. 1896년 4월 5일 전킨과 드루선교사 가족이 군산에 도착한 후 바로 다음날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데 이것이 군산교회의 출발이다. 선교사들은 1899년 군산교회로 불리던 군산선교부와 데이비스 여선교사의 궁멀기도처를 합병하여 '구암동산 선교스테이션'을 만들고 이곳에 구암교회(1899년) 안락소학교(1902년, 현 구암초) 군산영명학교(1904년, 현 제일중고등학교) 멜볼딘여학교(1913년, 현 영광중고등학교)와 구암병원, 구암교회를 세웠다. 3.1운동의 중심이 된 구암스테이션은 실제로 3.1운동 이전부터 군산경찰서의 주요 감시대상으로 주목받고 있었고, 교사들과 직원들은 연례행사처럼 3~4일씩 경찰서로 연행돼 사상과 신원을 검증받아야 했다.

군산의 3.5 만세운동은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당시 세브란스 의전 학생)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세브란스병원 약제실 근무)으로부터 건내 받은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2월 28일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 장로와 이두열 교사에게 전달함으로써 구체적인 거사가 시작됐다. 박연세 장로는 동료교사인 김수영과 멜볼딘여학교 교사 고석주를 비롯해 예수병원 직원들에게 뜻을 전하고 거사계획을 세웠다.

멜볼딘여학교에서는 비밀리에 태극기를 그렸고 영명학교 지하실에서는 독립선언문 3500매를 등사했다. 거사일은 군산 서래장날인 3월 6일로 정했지만 4일 새벽 이를 눈치 챈 경찰이 급습했고 박연세 장로와 이두열 교사가 연행되면서 자칫 좌절되는 듯 했다. 그러나 김수영 등 교사와 학생간부들이 회의를 열고 이날 오후 6시 교사와 학생 70여 명이 군산경찰서 앞에서 교사석방을 요구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고 방심하는 사이, 5일 정오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대한독립만세"의 외침과 함께 학생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교사와 학생 예수병원 직원과 구암교회 교인 등 150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설애장터를 지날 무렵 500여 명까지 불어났다. 점차 그 수가 증가하자 일본 경찰은 헌병대 지원을 요청했고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군산 3.5만세운동 이후 5월까지 군산시내에서 총 21회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2만5800명이 참가해, 피살자219명, 부상자 37명, 145명이 투옥됐다. 한편 3.5만세 운동 이후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는 수업이 중단됐고 교사와 학생 전원이 경찰조사를 받았으며 예수병원 직원도 전원 구속, 운영이 마비됐다. 군산의 만세운동은 큰 상처를 남겼지만 이를 시작으로 임실, 전주, 청웅, 정읍, 김제, 신태인, 삼례, 오수, 남원, 무주 등 전북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는 4월 4일 익산 남전교회 교인과 도남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익산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창영학교 교사였던 엄창섭은 3월 10일 강경 장날 청포리교회의 교인들과 만세운동을 벌이며 지속적으로 시위를 이끌어 갔다.

"1919년 군산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군산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228명이나 더 많았다"고 설명하는 강무순 목사(군산 성원교회)는 "군산 시민들은 일제의 핍박과 천시, 수모를 당하면서 온갖 착취 속에 시달렸다. 마음에 한을 품고 일본에 강한 저항의식을 품게 됐을 것"이라면서 군산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설명했다.

강 목사는 또 "군산의 만세운동은 당시 일본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본인 중심의 도시에서 자주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힘있게 알렸을 뿐 아니라 애국애족의 항일항쟁 운동으로 호남지역 3.1운동의 불씨가 되었다"면서 군산의 3.1운동을 평가했다. 무엇보다 강 목사는 "군산의 만세운동은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의 교사와 학생들이 중심이 된 만큼 기독교가 없이는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교단이며 교파의 구분없이 기독교 시민이 이뤄낸 결과물"이라고 덧붙였다.

최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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