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사로 북간도 3.1운동 주도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11. 정재면 <2> 용정을 기독교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작성 : 2019년 04월 22일(월) 10:17 가+가-

북간도지역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간민회 본부가 있었던 곳. /출처 독립기념관

1909년 명동학교에 부임하여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규암 김약연에게 복음을 전한 정재면은 이후 그와 함께 북간도 명동, 용정을 기독교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어 갔다. 정재면과 규암에게 복음전도와 신앙고백은 철저히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김약연과 함께 명동학교 학생, 명동교회 교인, 명동촌의 주민들 중심으로 기독전도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과 교육운동을 전개했으며, 기독교계 학교를 위한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교과서를 편수하여 항일구국의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했다. 정재면은 1911년부터 1914년까지 3년간 70여 처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그 중 학교와 교회가 병합하여 설립된 곳은 36처였다. 그는 전도와 사회교육을 함께 실시하여 교회조직을 기반으로 한인 사회의 안정적 통합을 가능하게 했다. 1912년 정재면은 또한 김약연, 이동휘, 계봉우 등 북간도 교회대표 16명 명의로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 간도지역의 의료기관, 중등교육기관, 교회 설립과 전도사업 확장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2년에 제출했고 이에 따라 용정에 캐나다장로교 선교부가 설립되었다.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캐나다 선교부 파송 선교사들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명신여학교와 제창병원이 설립되었다. 특히 제창병원은 독립군의 피난처가 되었다.

1913년 정재면은 용정교회 장로로 장립한 후 주일학교와 학무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15년 4월에 그는 간도지방 전도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용정교회 전도사로서 정재면은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 전(全)교회를 조직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18년 11월 13일 그는 평생의 신앙의 동지이자 민족운동의 동지 김약연, 강봉우, 김영학 등과 함께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에 참여하여 12월 전(全)간도 한인독립운동을 이끌어내었다. 또한 그해 12월 용정교회에서 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 연합기도회를 개최하였는데, 전도사 정재면은 제국주의의 영토침략전쟁이 종식되고 자유평등의 기독교적 가치가 세계에 구현됨을 감사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하자고 했다. 이어 1919년 1월 북간도 독립운동가 정안립(鄭安立)의 추천으로 여운형의 신한청년단에 가입하고, '전로한족중앙총회' 동만대표로 김약연과 함께 선출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정재면은 용정교회 전도사로서 북간도 전(全)교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용정교회를 중심으로 동만기독교청년회장을 역임하면서 정재면은 1919년 3월 13일 교회가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우선 정재면은 북간도 청년회 민족지도자들과 명동촌에 모여 김약연의 지도로 북간도의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간민회(墾民會) 회원을 기반으로 준비했다. 간민회는 1913년 정재면, 이동휘 등이 북간도 한인 공동기관 조직과 신생 중화민국 정부와의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조직되었고, 회장 김약연, 부회장 김영학, 총무 정재면이 이끌었다. 특히 간민회는 친일단체를 무력화시키면서 이주 한인들이 독립운동 노선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지도하였으며 1914년에는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해 왕청현에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했고, 특히 정재면은 이 사업에 매진했다.

1919년 1월 25일, 지역위원 20명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간도 각 지역위원을 선정했다. 이때 정재면은 강봉우, 정석함, 김정 등과 용정촌 및 두도구 지역을 책임 맡게 되었다. 또한 1919년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문창범 등이 3월 17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한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에 간도 대표로 김약연과 정재면, 이중집, 정기영이 수행하여 참여하게 되는데, 떠나기 전 2월 18일 정재면은 지역위원 민족지도자들과 구체적인 북간도 3.1독립운동 거사 계획을 수립했다. 이전에 이미 국내의 이승훈, 조만식에게 간도 독립운동 계획을 강봉우를 통해 연락하기로 결의하고 국내의 독립만세운동과 연계하여 진행했다. 김약연과 정재면이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가 주관하여 독립선언 축하식을 개최되었는데, 이때 북간도 독립기성회 대표 17명의 서명으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정재면은 명동촌 대표로 이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렸다.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7월 정재면과 김약연은 상해에 가서 임정 조직에 참여하였고, 정재면, 계봉우는 내무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임명받았다. 이들은 조선독립기성총회를 북간도 대한국민회로 개칭하고, 정재면은 국민회의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 국민회군의 무장, 군자금 모집, 군관학교 설립의 책임을 맡았다. 이듬해 1월 상해에서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모여 항일투쟁방법을 논의하는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가 개최되었는데 정재면은 기독교계 대표로 참석했다. 1920년 5월 국민회는 명월구 동북지역 이정배(二井背)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정재면은 행정을 담당했다.

신앙고백과 민족독립운동을 동일시하여 민족교육과 계몽운동에 헌신한 정재면은 북간도 용정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민족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후 그가 어느 정도 독립전쟁 무력항쟁에 참여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재면은 불의에 대항하여 억압당하는 이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력저항이 필요한 경우 신앙적 결단이 기독교인에게 요청된다고도 믿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무력저항이지만 이는 일제 침략의 불의와 악에 대항하여 의를 이루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제의 간도출병 이후 무장저항운동이 산간지역으로 철수하게 되자 정재면은 1923년 용정 캐나다선교부 소속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여 다시 교육활동, 전도활동, 한인사회 자치운동에 전념하며 민족운동을 이어가게 된다.

최상도 교수 / 호남신학대학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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