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 10:5-25, 눅 10:2-16)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19년 04월 25일(목) 17:43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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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선교의 존재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 실재로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눅 10:9; 마 10:7). 이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함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한다(눅 10:3; 마 10:16). 이것은 전형적인 '상징적 힘'의 충돌에 해당되는 것으로 지배적 문화에 직면한 절박한 상황을 묘사한다. '양과 이리'의 대조적 표현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주위 이방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본문은 이스라엘-이방의 대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선교는 팔레스틴에 국한되었고, 마태복음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명시하기 때문이다(마 10:6). 오히려 '이리'라는 부정적 이미지는 지도자들의 불신과 타락된 행위를 가리킨다(겔 22:27, 습 3:3, 잠 28:15, 마 7:15, 요 10:12, 행 20:29, 디다케 16:3). 예수에 대한 대적행위는 바리새인들과 예루살렘의 대표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또 예루살렘을 향해 파송된 자들을 거부하였다. 그렇다면 이리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힘 있는 지배층의 타락된 행위와 거부행위를 드러내 보인다.

예루살렘의 지배층은 성전을 소유한 자들로서 성전제도를 통해 그들의 지배권을 유지하며 성전제물로 그들의 배를 채운 자들이었다: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막 11:17b). 실례로 성전 제물로 사용된 비둘기 값이 심지어 50배, 100배로 인상된 적도 있었고, 성전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반 노동자들보다 수십, 수백 배에 달했다. 지배층은 하나님을 성전에 국한시켰다. 그 땅의 백성들은 '유대인의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된 십일조, 로마의 공세, 왕에게 내는 세금으로 거의 농작물 수확의 삼분의 일을 착취당하였다. 농민들이 다음 추수 때까지 남은 부족한 농작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따라서 부채를 질 수밖에 없었다. 과도한 채무로 인해 농민들의 땅은 그들의 채권자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상당수의 농민들은 마침내 일일노동자와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수는 하나님이 성전에만 소유될 수 없음을 선포하셨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고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셨다. 제자 파송, 즉 선교위탁 강화(mission discourse)는 그러한 예수 사역의 상징성을 담은 예언자적 행동을 드러내 보인다. 먼저, 주목할 것은 선교 지침이다.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고' 떠날 것을 명한다. 이러한 지침은 전적으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떠나라는 명령도 아니요, 평화 운동의 지침도 아니다. 예언자적 상징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 현재성/임재를 심각히 고려하지 않으면, 이러한 엄격한 성격의 명령은 실로 이상한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신발과 배낭과 지팡이는 여행자의 기본적 준비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순례자들이 여행 중 사용했던 지팡이나 신이나 전대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고 있다(Berakhoth 9:5). 미쉬나의 이러한 조항은 그 장소가 거룩한 장소임을 지적한다(출 3:5; 수 5:15; 신발을 벗는 관습은 지금도 불교도와 모슬렘 사원에 들어갈 때 행해지고 있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않은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그들이 성전에 들어와 있는 모습과 같다. 필자의 견해로는, 돈과 양식과 신을 금한 예수의 명령은 그 땅의 백성들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예언자적 상징적 행동을 나타낸다. 제자들에게 내려진 위탁은 백성들이 사는 그 땅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직접성(immediacy)을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성전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예화로, 임실에 270억 연소득 안기고 별세한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는 "군사독재에 길든 문화 속에 주민들 스스로 '이 땅의 주인공이 돼라'고 하셨다." 따라서 제자들의 파송은 순회전도 여행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는 파송된 제자들이 길에서 누군가와 인사하는 것을 금한다. 이와 같은 예수의 명령은 예수 자신의 표제적 활동(programmatic activity)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 현재성/임재는 구성원들 각자에게, 그들이 남을 돕고 병을 고치는 능력 가운데, 그들의 메시지 가운데 그들 가까이 임하여 그들에게 감동과 영향을 주었다.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샬롬)라는 인사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샬롬'이라는 인사말은 단순한 인사 그 이상이다. 샬롬의 인사는 사 52:7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다스림의 선언이요, 신약성서에서는 천사들이나 예수에 의해 표현된 하나님의 역동적 현재성/임재를 가리킨다(요 14:27, 20:1, 21, 26, 행 10:36, 눅 1:28). 따라서 그 땅을 거룩한 땅으로 선포하는 제자들의 활동은 영접 혹은 배척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선교는 '추수'(눅 10:2)로 묘사된다. 추수는 흔히 유대문학과 신약성서에서 역사의 종말론적 완결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음을 가리킨다(욜 3:13, 계 14:14~16, 미 4:12, 사 27:12, cf. 막 4:29, 마 13:39~42, 눅 3:17). 추수는 알곡을 거둬들이고 쭉정이는 불태우는 행위로 그 자체로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교 그 자체는 구원과 심판의 결과를 가져올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 현재성 임재의 종말론적 사건이다.

김형동 교수/부산장신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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