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논쟁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작성 : 2019년 04월 25일(목) 17:36 가+가-

박경수 교수.

아레이오스 vs 알렉산드로스

318년 이집트 북쪽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뜨거운 신학 논쟁에 휩싸였다. 논쟁의 양측 당사자는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감독과 아레이오스(아리우스) 장로였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아레이오스였다. 아레이오스는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영원하시며, 홀로 시작이 없으시며, 홀로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들은 비록 모든 시간 이전에 그리고 모든 만물보다 먼저 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무로부터 출생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레이오스는 '출생되지 않은' 하나님과 '출생된' 아들을 구분하였다.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그의 말은 아들이 영원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피조된 맏물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주장이었다.

알렉산드로스 감독은 만일 아레이오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구원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며 반론을 펼쳤다.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려면 그분은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318년 소집된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는 감독인 알렉산드로스를 지지하면서 아레이오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장로직을 박탈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중요시한 안티오케이아(안디옥) 학파 사이의 오랜 대립이 만들어 낸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레이오스가 안티오케이아에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두 사람의 논쟁이 고대의 두 학문 중심지의 해묵은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세비오스 vs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신학 논쟁은 교회만 분열시킨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 전체를 갈라놓았다. 그리스도교회가 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고 통일시키는 접착제의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에게 교회의 분열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자신이 볼 때에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 때문에 교회가 양분되는 상황을 황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제국 내의 주교들을 니케아(오늘날 터키의 이즈니크Iznik)의 호숫가에 있는 자신의 별궁으로 불러들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고,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니케아공의회가 325년 5월 20일 개최되었다. 이 최초의 교회보편회의는 두 달 이상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니케아신경이 발표되었다.

논쟁의 핵심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였다. 갑론을박 끝에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사실을 명시하였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었다. 이에 대해 아레이오스를 대변했던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오스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이 없어질 것이고 이것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성자와 성령은 하나님의 다른 양태 혹은 모습에 불과하며, 단일한 성부에 대한 명목상의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 이단의 재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유세비오스와 아레이오스는 성자는 성부와 '유사본질'(homoiousios)을 가질 뿐이라고 주장했다. 단지 이오타(i) 하나 차이 때문에 고대교회가 분열의 위험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니케아공의회는 동일본질을 핵심으로 하는 신경을 작성하였고, 아레이오스 사상을 정죄하는 진술을 덧붙여 모든 감독들에게 서명하라고 명하였다.



아타나시오스 vs 아레이오스

328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자 30살 남짓의 '검은 난쟁이'라 불리던 아타나시오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373년 죽기까지 45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일했다. 그는 아레이오스파의 반격으로 인해 무려 5차례에 걸쳐 17년 이상을 망명 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아레이오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장로로 복직시키라고 명령했을 때조차도, 아타나시오스는 그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을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는 한 그럴 수 없다고 맞섰고, 이 때문에 335년 첫 번째 추방을 당했다. 그는 사벨리우스의 양태론도 반대했지만,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아레이오스의 이단성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가 흔히 '아레이오스 논쟁'이라 부르는 사건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둘러싼 치열한 신학 논쟁이었다. 이후 여기에 성령의 관계까지 더해지면서 삼위일체 논쟁은 더욱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카파도키아 교부라 불리는 세 사람, 즉 카이사레아의 바실레이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의 위격과 관계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별도의 지면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마침내 아버지, 아들, 성령이 서로 구별되는 분이지만 동시에 세 위격이 동일한 한 본질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 교리가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20세기 '삼위일체 르네상스'

고대교회의 가장 뜨거운 신학 주제였던 삼위일체 교리가 20세기 들어오면서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 로마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 동방정교회 요하네스 지지울라스를 위시하여 수많은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논의를 진척시켰다. 위르겐 몰트만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비전과 관련하여 삼위일체를 논하였고,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삼위일체를 사회적 변혁과 연관시켰으며, 여성신학자 캐더린 라쿠냐는 사변적인 삼위일체 논의를 거부하고 구원과 삶의 현실에 연결시키고자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만,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지성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삼위일체는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이면서, 동시에 그만큼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루터와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삼위일체는 이해하기보다 믿어야 할 하나님의 신비요 계시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는 사색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교회 지도자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논쟁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설교뿐만 아니라 교리문답, 찬송, 교회력, 세례와 성만찬과 같은 예식 등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삼위일체를 보다 쉽게 성도와 학생들에게 전달하려고 힘써야 한다. 이것이 신학의 현장화를 위한 노력이다.

박경수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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