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복음화의 일등공신, 교사 정재면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11. 정재면 <1> 간도의 민족지도자 김약연에게 복음 전하다
작성 : 2019년 04월 16일(화) 09:43 가+가-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명동교회의 설립엔 정재면의 공헌이 컸다. 1909년에 설립된 명동교회는 해방 후 정미소로 사용되면서 본 모습을 잃고 폐허가 된 것을 1994년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단층 70여 평 크기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현재 명동역사전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독립기념관 제공

북간도에 세워진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인 명동(明東). '동쪽, 즉 조선을 밝힌다'는 뜻의 북간도 제1촌인 명동의 개척자는 김약연이다. 그는 이곳에서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기독교 이상촌을 만들어 일제의 침략으로 고난에 빠진 민족의 운명을 세울 인재를 기르는데 한 평생을 바쳤다.

김약연은 이웃 용정에 이상설이 1906년에 설립한 서전서숙이 이듬해 폐교되자, 명동에 자신이 1901년에 세운 규암재를 토대로 1908년 4월 27일 명동서숙을 설립하여 신학문으로 민족교육을 담당하였던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갔다. 1909년 4월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개칭되었고, 이후 명실공히 민족주의 항일 독립운동가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이런 명동학교가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바로 1909년 약관 22세의 정재면이 명동학교의 교육활동에 참여하면서 부터이다.

정재면(鄭載冕, 1884~1962)은 1884년 2월 14일 평남 숙천에서 부친 정학전(鄭學篆)과 모친 김성약(金聖約)의 아들로 출생했다. 본명은 정병태(鄭秉泰). 그의 부모는 한국 최초 개신교 그룹에 속한 기독교신자였으므로 정재면은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 1900년에 평남 순안의 측량기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고 1903년에 상경하여 한국 민족운동의 요람인 상동교회에서 최병헌 목사와 전덕기 전도사를 만났다. 정재면은 독립을 위해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최병헌 목사의 설교에 공감하며 당시 전도사로 상동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던 전덕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전덕기는 구원을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넘어 일제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민족운동을 목회의 과제로 삼았던 기독교 민족주의자다. 이런 영향으로 정재면은 교육과 선교를 통한 민족운동을 계획하고 실현해 나간다.

1903년 상동교회 내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에서 주시경, 남궁억, 현순, 전덕기 등에게 수학하며 기독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근대학문을 익혔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상동교회의 전덕기, 정순만은 전국 각지 청년회 대표들과 함께 구국기도회를 개최하는데 정재면은 이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진남포 감리교회 청년회 총무 김구,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준, 신민회 주동인물 조성환, 이동녕 등과 교제하게 되었다. 1907년 신민회가 결성되자 정재면은 자연스럽게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해 12월 정재면은 신민회 파송으로 원산 보광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복음에 기초한 교육구국운동을 이어가던 중 1908년 봄, 신민회 함경지방 책임자 이동휘와 이동녕의 제안으로 북간도 용정의 서전서숙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북간도 교육단을 조직하여 용정에 도착했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매각한 상태였다. 용정에 도착한 정재면은 먼저 용정 기독교서회를 중심으로 전도운동에 전념했다. 이러한 가운데 정재면은 서전서숙의 정신을 계승한 김약연의 명동학교의 교사로 초빙 받게 된다.

정재면은 명동학교로 부임하면서 김약연에게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때 정재면이 김약연에게 전한 복음은 예수운동이 곧 독립운동이며 교회가 독립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내용이었다. 정재면이 전한 복음과 그가 제시한 조건을 명동촌 지도자들과 며칠을 두고 심사숙고한 끝에 받아들인 김약연은 1909년 5~6월경 명동촌에 명동교회를 세웠고 명동학교에 성경과를 설치하였다. 정재면의 부임으로 명동학교의 교장은 김약연, 교감은 정재면, 재정은 문치정이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명동학교는 '신(信)', '망(望)', '애(愛)'의 기독정신을 토대로 민족교육을 시행하게 되었다. 1910년 명동학교에는 3년제 중학부가 증설되었고, 1911년 3월에는 이동휘가 명동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개최하면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여학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에 정신태, 이의순(이동휘의 차녀), 우봉순 등 여교원이 초빙되었고 여성을 위한 근대식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명동학교의 여학부는 한인의 중국 이주 역사에 첫 여성 교육터가 되었다.

정재면의 부임으로 명동학교의 변화 뿐 아니라 김약연의 일생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가 유학자에서 기독교 목사가 된 것이다. 1909년 41세의 김약연은 정재면으로부터 민족 구원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민족 교육을 통해 구국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화와 사상이 절실히 필요했고 그것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김약연의 기독교 개종은 당시 민족주의 지도자와 지식인층의 개종과 마찬가지로 망국의 현실 속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민족구원을 꿈꾸고 소망한 회심이었다.
비록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정재면과 김약연은 신앙과 민족독립운동의 평생 동지가 되어 활동하게 된다. 정재면을 통한 김약연의 개종으로 북간도 한인사회는 기독교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만주지역 민족 지도자들의 집단 개종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최상도 교수 / 호남신학대학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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