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과 독일교회의 역할
작성 : 2019년 04월 16일(화) 13:12 가+가-
1989년 11월 9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독일이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날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폴란드를 방문했다. 바르샤바에 도착한 콜은 바로 폴란드 총리 타테우시 마조비에스카 와 1차 정상회담을 했다. 회담 후 영빈관으로 돌아와 다음 일정을 준비하던 중 서독 총리실 장관으로부터 긴급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동독 정부가 주민들의 국외여행을 자유화했다는 것이었다. 독일 통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교회는 서독 정부와 협력해 1962년부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7년 동안 총 34억 6400만 마르크(약 17억 3천만 불)상당의 대가를 지불하고 동독 정치범 3만3755명 그 가족 25만 여명을 서독으로 데려왔다.

인권 내지는 인도적 차원의 교류도 실시했다. 동서독 정치범 석방 거래는 1962년 서독 개신교 연합회가 옥수수,석탄 등 트럭 3대분의 물품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동독에 수감되었던 성직자 150여 명을 서독으로 데려온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서독 정부는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개신교 단체 책임 하에 이 사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인권 정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반체제 인사 정치범 간첩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동독 측은 현금 지불을 요구했으나 서독 측은 27년간 세 번을 제외하고는 몸값을 곡물 바나나 등 소비재 중심으로 지급했고 규모가 커지면서 원유,구리,은 등 원자재를 공급했다.

서독 정부가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동독 정치범을 데려온 것은 인도적 도덕적 측면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서독 교회 정책을 검토할 가치가 있으며 대북 지원 시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당시 동방 정책 설계자인 서독 에바곤 대통령 특별 보좌관은 북한에 지원을 할 경우 세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고 했다.

첫째는 북한의 요청이 있을 때, 둘째는 반드시 대가를 받을 것, 셋째는 북한 주민이 한국이 지원한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 방범이 충족되지 않으면 북한 공산 정권 강화에 이용될 뿐이라고 지적 한 바 있다. 통일 후 동독지역 재건 비용으로 약 2조 유로 (약 2500조원) 가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며, 이는 매년 약 1000억 유로가 지원 된 셈이다. 독일 GDP의 4% 에 해당하는 거액을 지원하였으나 상당부분 연금,실업수당으로 통일 비용의 49.5%가 투입되었고 도로 철도 인프라투자는 19.5%에 불과했다. 부수비용으로 소련 고르바초프 요청으로 170억불 원조 제공 및 소련군 35만 동독 주둔 15만 명의 주택건설을 위해 25억불 투자하여 모스크바 인근에 현대 공사를 수주하여 하모니카 주택 5만호를 건축해 주었다. 독일 개신교회는 1945년 8월 냉전에 첨예한 대립 속에서 동서독 양 지역을 아우르는 27개 주 교회로 구성된 하나의 교단을 구성했다. 이것은 개신교 단합과 협동의 결과였다. 이 중에 라이프치히 교회에 평화의 기도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을 무너트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도 남한에 5300여 개의 교회가 교단과 교파별로 연합하고 힘을 모아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

그 첫 번째로 예장 통합교단과 합동 교단이 먼저 연합하는 소망을 가져 본다. 통합이나 합동이나 영어로는 유니온(Union) 아닌가 생각하며 나아가 남 북 통일을 위해 니콜라이 교회기도회처럼 우리도 한 곳에 모이지는 못해도 12시 정오에 각자의 위치에서 1분 기도를 하는 운동을 감히 제안해 본다.

이상필 장로/전 서울서노회 부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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