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설교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19년 04월 13일(토) 08:00 가+가-
예수 설교 (마 5:43-48; 눅 6:27-28, 32-36)

산상수훈(마 5~7)과 평지설교(눅 6)를 가리키는 예수 설교(Jesus Sermon)는 예수의 비전을 제시한다. 예수의 비전은 하나님이 아빠가 된 자녀들의 새로운 삶을 규명하는, 즉 하나님을 본받는 삶에 호소하는 대안적 비전이다. 예수의 비전의 중심에는 원수 사랑에 대한 명령(눅 6:27~28)과 서로 판단하지 말라는 요구(6:37~38)가 자리 잡고, 하나님 닮음(imitatio Dei)의 모티브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자비하라(마 5:48; 눅 6:36). 사람이 하나님을 닮을 수 있음은 첫째,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이요, 둘째,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에 의함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전통적 에토스인 거룩의 에토스가 아니라 온전/자비의 에토스를 제시하셨을까? 마태와 누가의 평행 본문에서 온전과 자비는 같은 개념인가? 아니면 다른 개념인가?

예수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거룩"의 이데올로기였다. 거룩의 기본적 뜻은 "자르다/분리하다"이다.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이방 세계와의 분리 바로 거룩성에 있었다. 하지만 거룩의 에토스가 통치 이념이 되어버려 소수의 의인에 의해 소유되어졌을 때, 그것에 의해 파생되는 것은 이분법의 논리에 의한 무고한 죄인들과 아웃케스트(버림받은 자들) 그룹의 양산이었다. 거룩의 이데올로기는 유대 사회의 깊어 가는 내적 분열과 외세(로마)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정황에서 예수는 하나님 닮음의 모티프를 온전/자비로 외치신다.

예수는 분명히 당시의 거룩의 이데올로기에 도전하였다. 온전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타밈'은 "구분/분리가 없음"을 뜻한다. 인사와 문안에 관한 언급과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내리는 해와 비에 관한 언급은 하나님의 구분과 차별이 없는 자비하심을 드러낸다. 예수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은 선함에 있어서 제한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온전/자비이다. 예수 설교는 하나님이 "아바"(아빠)가 된,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온전/자비에 기초한 새로운 삶을 규명한다. 이는 사랑의 계명으로 특징되는 새로운 도덕적 의무인 용서와 온전한 베풂으로 표현된다(마 5:44; 19:21).

첫째, 용서는 새로운 사회적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무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주제였다. 죄의 용서는 18기도문과 시편 145편 8절 이하가 묘사하듯이 왕으로서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중심적 일면이며,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의 "기조"(keynote)이다. 구약성서에서 죄의 용서는 역사 내에서의 특별히 거룩한 제도인 율법과 희생제사에 묶어져 있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빚진 자를 용서하는 것처럼 우리의 빚/죄를 용서하옵소서"라는 아버지의 선하심에 기초한 용서의 기도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를 가지는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용서는 공동체 내의 서로의 몫이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도(마 18:23-25), 비유의 요점은 정의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행위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도(눅 16:1-13), 주인은 빚의 양을 삭감한 청지기의 이상한 행위(아마도 그의 자비로운 행위)를 칭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율법(의 엄격함)이 아니라 바로 자비로운 행위이다. 이러한 온전/자비의 에토스는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인종적 경계를 초월하여 탈민족주의화 현상으로 발전하며, '평화/화평' 개념에도 적용된다. 이방인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를 받아들인 일은 이사야 57:19에서 말한 가까이 있는 자와 먼 곳에 있는 자를 향한 평화의 선포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행 10:36).

둘째, 온전한 베풂은 엄격한 보상의 원칙과 자족적 가정경제 원칙의 전제 위에 확립된 지배적 질서를 위반한다. 하지만 그러한 베풂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어떤 능력을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모두는 이제 개인의 경제적 안정보다 더 큰 무엇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온전한 베풂은 소유욕과 탐욕에 대한 폭넓게 경고하고 있다(막 7:22; 눅 12:15; 골 3:5; 엡 5:3 참조), 나아가 일상의 염려에 대한 경영 콤플렉스를 경계한다(마 6:25 이하). 이러한 에토스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주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원래 이는 왕들과 상류층의 기품과 행동을 증명하는 덕목에 해당된 격언이었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평범한 민중에게 적용되어 엄격한 노동 윤리와 연결되었고, 또한 자발적 포기와 금식과 연결되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가난한 자나 궁핍한 자가 생길 경우, 그를 위한 여분의 식량이 없으면 그들은 하루, 이틀을 금식함으로써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을 마련했다"(Apologie 15.8).

요약하면, 용서와 온전한 베풂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급진적 에토스이다. 우리는 이를 "중간기 윤리"(interim ethic)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용서와 온전한 베풂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하는 예수 설교의 기조로 태생적 혹은 선택적 인간의 한계가 이를 통해 초월될 수 있다는 점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김형동 교수(부산장신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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