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남지역 기독교 3.1운동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
작성 : 2019년 04월 12일(금) 16:56 가+가-

탁지일 교수

부산경남지역 기독교 3.1운동 100주년을 교회사적으로 조명하는 심포지엄이 지난 3월 14일 부산장신대학교 부설 부산경남교회사연구소 주최로 진행되었다. 이날 모임에서, 호주교회의 부산경남 선교지부(mission stations)가 위치했던 부산, 마산, 통영, 진주, 거창에서 전개된 기독교 3.1운동에 대한 연구발표와 함께, 3.1운동 100주년의 교회사적 의미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특히 이날 심포지엄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부경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박시영 목사(밀양 무지개전원교회, 고신) 등 지역의 타 교단 목회자들과 지역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함께 참여해 진행된 뜻깊은 행사였다. 진주와 거창지역의 기독교 3.1운동에 대해서는 이종민 목사(교회사 박사과정, 사천 사촌교회), 마산과 통영지역은 오명균 목사(교회사 석사졸업, 경주남부교회), 부산지역은 김왕범 전도사(교회사 석사과정, 부산 안락교회)가 발표했다.

부산경남지역의 3·1운동은 3월 11일부터 4월 29일까지 약 50일 동안 전개되었다. 총 179회의 크고 작은 시위가 있었으며, 사망자 81명, 부상자 233명, 검거된 자가 754명에 이르렀고, 시위 참가 연인원은 10만여 명에 달했다. 경기와 이북지방의 3·1운동이 주로 기독교와 천도교에 의해 일찍 시작된 반면, 불교와 유림이 강성한 영남지방에서는 비교적 늦게 일어났다. 하지만 부산경남지역의 3.1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동일한 장소에서 수차례 연속적으로 봉기한 곳들이 많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부산지역 최초의 3.1만세운동은 호주선교사들이 설립한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 시작됐다. 3월 10일 월요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 11명은 이불로 창문을 가린 후 태극기 100여 개를 제작했다. 이때의 태극기 제작에 참여했던 김반수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들은 기숙사 방에 모여 촛불을 밝히고 태극기를 만들었는데, 태극기를 만든 옷감은 혼수용으로 부모가 준비해 두었던 옥양목 한필이었으나 부족하여 마을 포목점에서 추가로 구입하여 마련했다. 태극의 원은 사발을 뒤집어서 그렸고, 깃대는 학교 주변 대나무 밭에서 구해 100여 개의 태극기를 준비했다고 한다. 3월 11일 저녁 9시 경 이들은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로 인해 선교사, 교사, 학생 등 40여명이 체포되어 감금되었으며, 학생들은 징역 6월 그리고 교사 2명은 징역 1년 6월을 각각 선고받고 복역한다.

마산지역은 구마산 장날 시위와 삼진의거를 들 수 있는데, 초기단계에서는 도심을 중심으로 기독교계 인사와 교사 및 학생 그리고 지역 유림 등 식자층의 계획과 주도로 시작되었다. 본격적 시위가 전개되면서부터 농민, 어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만세시위로 확대되었다. 초기단계의 만세운동은 기독교 학교인 창신학교와 의신학교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통영지역도 독립선언서의 배포, 그리고 학생 및 기독교인들의 주도적인 활동이 만세시위의 시발점이 되었고, 근대교육을 받았던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진주지역은 3월 18일 진주 장날에 시작되었다. 진주읍 장날은 도내에서 가장 큰 장으로 1만 명 전후의 인파가 모이는 날이었다. 이날 시위에서 기독교 학교인 광림학교 악대원 출신들이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각자 악기를 들고 연주하며 시위대를 이끌었으며, 교사와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장날 정오에 진주교회 마당의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수천 군중이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또한 기독교 선교병원인 배돈병원은 만세시위 부상자를 치료하고 수용하는데 힘쓰며 만세운동을 지원했다. 거창지역 3.1운동도 거창교회를 중심으로 군내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계획되어 추진되었다. 3월 20일 거창으로 3.1독립만세시위가 확산되었고, 이때 주남선 목사는 오형선과 고운서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기독교세가 열세였던 부산경남지역이었지만 독립만세시위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수적으로나 지속성에 있어서 두드러진 면모를 보였다. 1919년 3~4월에 걸쳐 계속된 부산경남지역 3.1독립만세시위는 남녀노소 평범한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학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이곳에서 사역하던 호주선교사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심포지엄 연구발표를 마친 후, 3.1운동이 부산경남지역에 끼친 교회사적 영향과 현재적 의미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고, 자연스럽게 신사참배 관련 논의로 이어졌다. 이는 부산경남지역이 일제강점기말 신사참배로 인한 배교와 순교의 중심지였고, 이로 인한 한국장로교 최초의 교파분열이 야기되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부산장신대 학생들의 교파별 배경이 고신, 합동, 통합 등 다양한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신사참배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자주 이슈로 등장하는 현재 진행형이다.

신사참배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는 가운데, 부경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인 고신교단의 박시영 목사는 "기독교세가 가장 열악한 부산경남지역의 모든 교파들은 이제 정죄와 분리를 넘어 화해와 연합의 신앙을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신앙 선배들의 유훈이다."고 언급하여 모든 참석자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다.

이날 모임을 마무리하면서 참석자들은 '1919년'과 함께 '1938년'이 주는 교사회적 의미를 되새겼다. 이는 기독교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1919년의 3.1운동 20년 후인 1938년에 신사참배 공식 결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3.1운동 100주년 기념과 함께,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의 오욕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100년 전 그때처럼 하나님과 민족을 섬기는 건강한 신앙공동체로 다시 거듭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가슴에 새겼다.

탁지일 교수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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