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독립을 위한 희생의 삶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9. 김필례 <1> 金弼禮, 1891-1983
작성 : 2019년 03월 12일(화) 16:17 가+가-

김필례 선생.

김필례(金弼禮, 1891-1983)는 1891년 12월 19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贍)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김필순의 누이동생이고 김순애의 동생이며, 또 김마리아의 고모이다. 이들은 모두 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는 희생의 삶을 살았다.

황해도 소래교회 첫 세대 교인인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난 김필례는, 당시 만 12세 이상이 되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는데 예외적으로 9세에 모든 교인이 보는 앞에서 세례문답을 통과하고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1897년 소래교회의 병설학교(해서제일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서울로 유학 와서 연동여학교(지금의 정신여자중고등학교)에 다닌 그녀는 학습능력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서 두 번이나 월반했다. 1907년에 제1회로 졸업한 그녀는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이미 이전의 글에서 소개되었는데, 김필례의 오빠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1908) 졸업생으로서 한국 최초의 의사(양의)였다. 그는 의료선교사 에비슨과 함께 서양의학교과서 '해부학'(3권)을 한글로 번역 출판했다. 1911년에 그는 빼앗긴 국가주권의 회복을 도모하고자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으로 갔다.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운 그는 통화현 등지에서 이상촌을 건설했다.

김필례는 1908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여자학원 중등부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11년, 학비를 지원하던 오빠 필순이 서간도로 건너가는 바람에 그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녀는 - 서간도 통화현에서 보낸 오빠의 편지를 받고서 - 일시 귀국하여 가족들을 필순의 거주지로 가도록 보살핀 다음에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그녀는 1916년 도쿄여자학원 고등부를 졸업했다. 그녀는 1926년 미국 조지아주 애그니스 스캇 여자대학(Agnes Scott College)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1927년 뉴욕 콜롬비아대학(Columbia University in the City of New York)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대 당시의 도쿄 여자학원의 규정에 따라 김필례는 졸업(1916) 후 5년을 교사로 일해야 했다.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가 일본 도쿄의 이 학교로 직접 찾아와서 김필례에게 의무로 정해진 5년을 정신여학교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김필례는 1916년 3월 귀국하였다. 1918년 그녀는 의사 최영욱과 결혼했다. 신혼부부는 치치하얼에서 병원을 개업하며 이상촌을 운영하고 있는 오빠 필순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필례 부부는 필순이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에서 봉사했다. 그러다가 시어머니 공씨의 건강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소식을 받고서, 부부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전라남도 광주로 왔다. 남편 최영욱은 서석의원을 개업했다.

1919년 초반에 조카 김마리아가 도쿄에서 비밀리에 품고 온 2.8독립선언서를 서석의원에서 수 백 장 복사하여 서울로 가져갔다. 김필례의 시숙 최흥종 목사 역시 광주 3.1독립만세시위를 기획했는데, 그는 서울 3.1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여서 체포되었다. 그의 동지 김철이 광주로 와서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했다. 3월 10일 광주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김필례 부부는 만세시위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녀는 곧 석방되었다. 남편은 혹독한 문초를 받았으나 다행히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임희국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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