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일본서 존경하는 평화주의자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9년 03월 06일(수) 09:24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8. 안중근 <3>숨겨진 이야기-그에 관한 오해와 진실
안중근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존경받는 평화주의자이며 선각자다. 그에 관한 수많은 일화 중에서 특히 백범 김구와의 관계 및 그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해를 돕고자 한다.



백범 김구와 안중근의 만남

1876년생 김구(金九)와 1879년생 안중근은 대한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황해도 출신인데다가 나중에 안중근의 친동생인 안정근의 딸 안미생(安美生)이 김구의 장남 김인(金仁)과 결혼하여 사돈지간이 된다. 이들의 만남에 대해 '백범일지'를 풀어서 쓴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이렇게 소개한다.

"전군을 구월산 패엽사로 옮길 준비를 하던 어느 날 밤, 신계군 청계동에 사는 안태훈 진사가 밀사를 보내왔다. 안 진사는 안중근 의사의 부친이다. … 안태훈의 토벌군은 1894년 12월 안중근을 앞세워 동학 접주 원용일 부대 2천여 명을 대파해 동학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 그런 안태훈이 동학접주인 내게 왜 밀사를 보낸 걸까. 내막을 알아보니 안 진사는 비밀리에 내 신상이며 행적을 조사한 뒤 '팔봉 접주가 아직 어린데도 대담한 인품을 지녀 사랑스럽도다하여 토벌하지 않겠지만, 그가 만약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멸당한다면 인재를 잃게 될 일이 아깝노라'며 좋은 뜻으로 밀사를 보냈다는 것이다.(하략)"

이 사건을 계기로 맺어진 인연은 김구 가족이 청계동으로 이사하여 의탁하게 되면서 안중근 집안과 3대에 걸친 특별한 인연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이견도 있다. 안천 교수는 이때 김구가 안중근 부대의 습격을 받고 생포되었으나, 안태훈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안 씨 집안사람으로 편입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던 김구에게는 안태훈·안중근 부자와의 만남이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하얼빈 거사 후 체포된 안중근은 "사형이 선고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당부대로 공소도 포기한 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자는 자서전이고, 후자는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안중근은 저술이 끝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일제는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그의 미완성 유고인 '동양평화론'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의명분으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할 것을 내세웠기 때문에 대의를 얻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한국 국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한국 국민과 원수가 되었다. 이제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하는 길은 우선 한국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에 대한 침략 야욕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후 동양 3국이 일심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며, 서로 화합하고 개화 진보하면서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다."

안중근은 생전에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의 실천방안에 대해 역설한 바 있다. 요약하면 ①뤼순의 개방 ②한중일 3개국 평화회의 구성 ③3국이 공동출자한 공동은행 설립 ④3국의 청년으로 공동 군대를 설립 ⑤상공업의 발전 도모 ⑥교황청으로부터 3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방법 등이었다. 동양평화론의 요체는 동북아의 평화를 추구하는 공동체 구성이었다. 지금 한반도는 평화와 통일의 전환점에 서서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를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김형석 목사 / 역사학 박사, 통일과역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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