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태우고 종탑 허물었지만 정신은 남아"
익산지역, 남전교회와 제석교회
작성 : 2019년 02월 27일(수) 08:06 가+가-


익산지역의 3.1운동은 남전교회를 중심으로 한 '4.4만세운동'이 가장 큰 규모의 의거로 세간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4월 4일 만세운동에는 남전교회의 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6명이 죽고 39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 후대들이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4월 4일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 선조들은 익산에서 3.1 만세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고, 이 가운데 익산노회 제석교회가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아울러 이에 대한 연구도 부족한 상태다.

그러나 최근 제석교회 담임 정경호 목사와 독립운동가 후손 교인들의 노력으로 익산, 강경 지역 3.1운동에 있어 제석교회 출신들이 주역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발굴되어 학계에서도 주목을 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교인 엄칠중이 백범 김구 선생에게 받았던 '담백명지'라는 글자를 소개하는 담임정경호 목사. 그러나 백범 선생의 이 글씨는 후손이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 원본이 타인에게 가 있는 상태이고, 이 글씨는 인터넷에서 정 목사가 찾아내어 확대 인쇄한 것이다.
제석교회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역사 자료물.


정경호 목사는 익산 3.1운동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전북지역 3.1운동 경로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운동을 잘 파악해야만 그 역사성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 목사는 "군산의 3월 5일 만세운동은 강인성과 강관성 형제가 주동했으며, 군산에서의 거사에 참여했던 한길용과 강금옥이 익산의 제석교회로 들어와 이형우, 엄연길, 허진엽, 엄칠중, 엄창석 등의 제석교회 출신자들과 연합해 익산과 강경의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며 "군산과 강경의 3.1운동에 제석교회 출신자들이 관여했다는 재판기록과 익산과 강경의 독립운동사를 살펴보면 제석교회가 두 지역의 3.1운동 발상 거점지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중 엄칠중은 만주에서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고향으로 내려온 인물이며, 강금옥은 강경 3.1운동 거사를 위한 연락책을 맡아 학교 선배인 교사 엄창섭을 데리고 왔고, 엄창섭은 다시 강경으로 가서 자신이 재직하던 창영학교에서 고상준, 추병갑 등과 계책을 세우며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제석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강경 3.1운동시에는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등을 등사하는 비밀 공작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동자들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투옥 및 고문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정 목사는 제석교회가 익산과 강경 3.1운동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교회가 설립한 사립부용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사립부용학교는 군산 3.1운동을 접한 학교 출신자들이 선후배가 되어 운동을 이끌었으며, 무엇보다 3.1운동 이념 형성 및 확산의 매개가 되었다. 초등학교 과정이었던 사립부용학교의 졸업생 중 상당수는 군산의 영명학교로 진학했는데 영명학교 출신들도 군산 3.1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제석교회가 익산과 강경 지역의 3.1운동 거점이 되어 민족정신을 떨쳤지만 이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제석교회 출신들이 3.1운동에 앞장선 것을 파악하고, 교회가 이들의 거점이 된 것을 파악한 일제는 병력을 앞세워 교회를 폐쇄조치했다. 3.1운동의 시작을 주민들에게 알렸던 종탑은 부셔버렸고, 평화와 정의의 정신을 배울 수 있었던 성경은 불태워졌다. 교회 부설 교육기관으로 민족정신을 가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사립 부용학교도 폐쇄 됐으며, 나중에 일본소학교로 강제 수용을 당하기도 했다.
제석교회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역사 자료물.
제석교회는 이렇게 극심한 박해를 입었으면서도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교회 안에는 친일을 한 이도 있었지만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는 남아서 같은 교인들을 지키고, 교회를 완전히 붕괴하지는 않았다. 또한, 일제의 무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폭력 평화운동을 관철했으며,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이 함께 참여하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정 목사는 "그동안 익산과 강경 3.1운동의 발상거점이 역사적으로 규명되지 못한 채 단지 3.1운동이 있었다는 정도의 역사 서술이 있었지만 제석교회 출신자들로 규합 된 3.1운동 주역이 새롭게 발굴되어지면서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됐다"며 "1운동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민족의 위기 앞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자랑스러운 역사를 제석교회를 통해 느끼게 됐다. 앞으로도 희망이고 등불이어야 한다. 우리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마중물이었다. 다시 한국교회가 위기의 시대에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의 새로운 전기로 삼아야 한다. 이는 우리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국교회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제석교회는 지난 2014년 총회 지정 한국기독교사적 19호로 지정됐다.



# 교회가 중심이 된 '익산 솜리 만세운동'
남전교회

남부시장 순국열사비 및 문용동 열사 동상
총회 유적지18호 패.
익산에서 가장 중요한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난 '솜리 만세운동'이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남전교회(반성석 목사 시무)가 있다.

익산의 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합해 3월 10일 밤 9시를 기해 전군민이 참여하는 봉화시위로 촉발됐다. 군내 16개 면 전역에서 장터를 거점으로 확산되어 가던 운동은 4월 4일에 이르러서는 남전교회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조직적인 만세운동으로 변한다. 익산 최초의 교회인 남전교회가 위치한 오산면은 일본인 농장주들의 횡포로 우리 동포들의 울분이 가득한 곳이었다.

남전교회 교인이었던 김치옥 집사는 익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작정하고, 교인인 박성엽, 문용기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고 당시 담임이었던 최대진 목사와 긴밀히 협조했다. 그리고 거사일을 당시 전북의 가장 큰 장이 섰던 이리장에서 4월 4일로 정했다. 이들은 도남학교 학생들, 인근 교회의 교인들, 익산 지역 천도교인들,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청년들을 포섭, 거사를 진행해나갔다.

교회에서는 조선독립에 관한 교육을 했고, 만세운동 전날에는 남전교회 교인들이 대형 깃발과 현수막,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했다. 4월 4일이 되자 남전교회 교인들 150여 명은 교회 안마당에 모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받아 몸에 숨기고 이리장터로 향했다. 문용기는 군중들 앞에서 연설을 했고, 김치옥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낭독했다.

이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위대는 1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시위대는 당시 일제 쌀 수탈의 상징이었던 대교농장을 향했다. 그러나 호남지역 최대 쌀 창고를 지키기 위해 주둔하던 일제 헌병대와 2개 중대가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고 칼과 곤봉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남전교회 교인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이 순국했고, 수많은 이들이 부상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남전교회의 귀한 역사가 인정되어 지난 2014년 총회 역사위원회는 남전교회를 한국기독교사적 18호로 지정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교회의 교단 분화시 남전교회는 기장측과 합동측으로 나뉘어 현재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남전교회가 익산 내 3곳이나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 보존과 계승에 적극적이었던 곳은 분열 당시 당회록을 가지고 있었던 기장측 교회여서 그동안 기장측에서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고, 예장 통합측의 남전교회는 역사복원에 뒤늦게 뛰어들어 상당부분 그쪽의 자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표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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