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심장을 쏜 영원한 대한인(大韓人)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9년 02월 19일(화) 18:40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8. 안중근 <1> 세례명 도마, 삼흥학교 설립

하얼빈 의거 직후 붙잡힌 안중근. /출처 독립기념관

안중근(安重根)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 마리아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 씨 집안은 원래 향리(鄕吏) 신분이었지만 조부가 미곡상으로 사업에 성공하여 3천 석 지기의 대지주가 되었다. 부친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였으나 전통적 유생의 자리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다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낙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집안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서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거했다. 안중근은 이곳에서 조부로부터 한학과 역사를 배워 민족의식을 키우는 한편으로 전통 무예와 사격술을 연마하면서 호연지기를 길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부친은 포수들로 군대를 조직하여 동학군 토벌에 나섰고 안중근은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이듬해 안중근은 부친을 따라 천주교로 개종하고 빌렘(J.Wilhelem) 신부로부터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했으나 이곳에서 만난 르각(Le Gac) 신부에게서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 귀국했다. 1906년 진남포로 이사한 후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고 곧이어 천주교 계열 돈의학교(敦義學校)에서 교육에 종사했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으나, 그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면서 실질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하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는데 이곳에서 '필생의 동지'가 된 최재형(崔在亨)을 만났다.

함경도 경원 출신의 최재형은 9살 때인 1866년에 이주해 온 최초의 고려인 이민자로서 러시아의 정규교육을 받은 후 하급 선원,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고생 끝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그는 고려인공동체를 위해 사재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존경을 받았는데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1908년 최재형이 중심이 되어 '동의회'를 창립하고 이범윤을 총대장, 안중근을 참모중장으로 의병을 결성했다. 연해주 의병은 초반에는 국내의 홍범도부대와 연합작전으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들을 풀어주는 실수로 인해 영산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의병전쟁이 실패하자 최재형은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인수하여 국제적인 여론전을 전개했는데, 안중근도 대동공보에 근무하면서 고통스런 인내의 시간을 가졌다. 1909년 3월 2일 안중근은 동지 11명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 모여 단지회(斷指會)를 결성했다. 이들은 왼손 넷째 손가락(무명지)의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大韓獨立'이라 쓰며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을 암살 제거할 것을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지체 없이 이토 사살 계획을 실행했다. 이때 대동공보 사장 유진율은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고, 회계원 우덕순은 안중근과 동행을 자원했다. 안중근은 10월 21일 우덕순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후 유동하와 조도선을 합류시키고 하얼빈역과 채가구역 두 곳을 거사장소로 정했다. 채가구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은 안중근이 담당하고 양측의 연락은 유동하가 담당했다. 안중근은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한 후 9시 30분경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 이때 의장대 후방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안중근은 브로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즉사했다. 안중근은 러시아군에 체포될 때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했다. 영원한 대한인의 모습이었다.

김형석 목사 / 역사학 박사, 통일과역사연구소 소장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