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항거한 용기, 부흥의 활력 됐다
김포지역
작성 : 2019년 01월 21일(월) 18:38 가+가-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된 조형물. 1919년 김포 지역에선 장터 등을 중심으로 수차례의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기념관에 전시된 얼굴 없는 독립 운동가들.
당시 경서 지역의 3대 시장 중 하나로 두 차례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오라니장터 위치엔 현재 도로와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김포중앙교회 정재화 목사(우측)과 취재해 동행한 김한수 장로.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한 김포시는 농경에 적합한 넓은 평야지대로, 시의 중심부를 한강이 관통하고 있다. 3.1만세운동 당시 김포는 꽤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은 물론이고, 인천 서구와 서울 양천구 및 강서구 일부까지가 김포로 불렸다. 기록에 따르면 1919년 3월 22일부터 29일까지 김포에선 총 1만 5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등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수차례 이뤄졌다.

당시 한강의 지류들은 좋은 이동통로가 됐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배를 타고 이동하며 뿌린 복음의 씨앗은 1894년 김포읍교회를 시작으로 송마리교회, 누산리교회, 풍곡교회, 개곡교회 등으로 열매를 맺었다. 이후 김포읍교회는 1962년 교단 분열로 통합측 김포중앙교회와 합동측 김포제일교회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마리교회와 누산교회 역시 본교단 교회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개곡은 합동측 교회가 됐고, 풍곡교회는 없어졌다.

기자는 지난 18일 김포중앙교회에서 담임 정재화 목사와 원로 김한수 장로를 만났다. 83세인 김한수 장로는 당시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부친 김영일 장로에 대한 기억을 뚜렷이 갖고 있었다.

김 장로의 부친은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던 양촌면 오라니장터 시위에 함께했다. 1919년 3월 23일, 그날은 장날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이불 속에 태극기를 보관해 온 김 장로는 장터로 이동해 대기하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일순간에 온 장터가 만세 함성에 휩싸였고, 울분과 감동에 북받친 사람들은 모두 얼싸안으며 눈물을 터뜨렸다. 두려움을 이겨낸 만세 함성은 29일까지 다른 장터와 마을 곳곳에서 불시에 울려퍼졌다. 김 장로는 당시 왜경이 가담자 체포에 나섰지만, 험한 시골길을 자전거로 이동해야 했던만큼 빠른 대응이 어려웠고, 덕분에 부친도 옥고를 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포시 양촌읍 양곡리에는 오라니장터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 공원에서 1km거리엔 시가 조성한 독립운동기념관이 있는데, 전시실엔 오라니장터 만세운동을 재현한 조형물이 있다. 김 장로는 당시 오라니장터의 위치나 모습이 기념물들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 장터 자리는 공원에서 도로를 따라 1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양곡초등학교 옆 거리로, 지금도 도로를 따라 상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당시 장터는 좁은 골목길을 두고 양쪽에 상인들이 자리잡은 모습이었으며, 함성은 행인들 사이 사이에서 터져나왔다고 한다.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만난 해설사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활발히 만세 운동에 동참했던 것에 대해 학교처럼 교회도 경찰의 감시를 덜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곡창지대로 대규모 수탈이 이뤄졌고, 의병 활동지여서 많은 밀정들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은밀히 시위를 준비하고 거행하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당시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월곶면 출신 신학생 이경덕이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3월 22일 군하리장터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23일에 벌어진 오나리장터 시위에선 누산리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같은 날 2차로 열린 시위엔 송마리교회 영수 출신인 이효원이 주도자에 포함돼 있었다는 정도가 전부다(김진수 저 '언더우드 선교사 김포사적 조사'). 그 외 대부분의 교인들은 기념관에 전시된 다른 애국지사들처럼 이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교회의 활기찬 분위기를 김포중앙교회 당회록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김포중앙교회 111년사는 '3.1만세운동으로 인해 교회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당시 당회 기록은 횟수로만 남아있다'고 기록하며, 1919년 당회록에 실린 세례, 학습, 유아세례자 명단을 소개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1919년 12월 말 세례자는 20대 남성 1명, 20~50대 여성 3명, 학습자는 20대 남성 1명, 10대 여성 3명, 유아세례는 1~2세 아기 7명으로, 총 15명의 이름이 남아 있다. 필자는 '교회가 독립운동에 동참하면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 영향인지 1920년대에는 새로 입교하거나 들어오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당시 상황을 분석했다.

교회는 그렇게 민족과 함께 어려운 시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김한수 장로는 1945년 라디오에서 일제가 항복한 것을 전해듣고 온 마을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함께 만세를 부르던 기억을 전했다. 그리고 그때 쫓겨가던 일본인이 내뱉은 한 마디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10년 후에 다시 올 것이다."

물론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만세운동의 주역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정재화 목사와 김 장로는 교회와 선배 기독교인들의 소중한 이야기들이 사라져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특히 지역에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인구이동이 늘면서 역사를 보존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김포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중엔 20, 30대가 많았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비슷한 연배의 교인들에게 잠시라도 선배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차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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