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독립과 결혼하다'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9년 01월 22일(화) 08:00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7. 김마리아 <1>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의 생애

2012년 김마리아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모교인 정신여중고 교정내에 건립된 흉상.

3.1만세 운동이 나이, 성별, 종교를 뛰어넘어 온 민족이 전국에서 일으킨 독립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인원을 동원하고 운동을 조직하고 소통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제 헌병대의 1919년 말 조사에 따르면, 만세운동 관련 기소피고인 총 19,525명 중 개신교인이 3,426명으로 전체 17.6%에 이른다. 특히 여성 피검자 총 471명 중 309명이 개신교인으로 65.5%나 차지한다. 만세운동에 개신교가 특히 여성 개신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성 개신교 독립운동가 중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여, 남자가 독립 운동하듯 여성이지만 '조선 사람으로' 당연히 조선독립 운동을 펼친 김마리아를 살펴 3.1운동 100주년의 의의를 찾아보자.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 소래의 한반도 내 개신교 최초 교회를 설립하는데 주요한 공헌을 한 광산김씨의 기독교 입신 이후 '3세대'에 해당하는 '신여성'으로, 대한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개신교 지도자였다. 그녀는 1915년에 동경여자학원 영문과 수학 중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비밀리에 반입하여 유포하며 국내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 등 국내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일경에 체포, 수감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1921년 중국 상해로, 1923년에는 다시 중국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1932년 귀국 때까지 10여 년 이상을 해외에서 수학하며 교육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였다. 귀국 후 1933년 봄, 원산의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에 교수로 부임하여 1943년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후학을 양성하다 1944년 해방을 눈앞에 두고 평양 기독병원에서 3월 13일 향년 53세로 생을 마감했다.

김마리아의 생애를 성장기(1892~1915), 일본 유학기(1912, 1915~1919), 국내 독립운동기(1919~1921), 망명기(1921~1932), 귀국 활동기(1932~1944)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성장기를 제외하고 그녀는 언제나 한국 여성들의 모임을 주도 혹은 조직하여 발전시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유학 때 그녀는 재일 조선인 남자 유학생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인유학생학우회'와는 별도로 재일 조선인 여자 유학생들이 조직한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고모인 김필례를 뒤이어 1917년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어 이끌어 나갔다. 국내 독립 운동 중 1919년 10월 여성계 대표 18명이 모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침체되어 있던 여성 민족운동을 이끌어 한 달여 만에 회원 2000여 명, 전국 15개 지역 , 해외지부 설치 등 조직을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망명 중에도 거처하는 곳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1928년 1월 뉴욕에 있는 여자 유학생들을 모아 근화회를 조직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며 조국 광복의 대업을 촉진하였다. 귀국 후 김마리아는 1933년 장로교여전도회(현 여전도회전국연합회) 7대 회장으로 선출 된 후 4년간 회장을 맡아 여전도회 조직을 크게 발전시켰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장로교여전도회의 조직을 맡아 조직을 확대 발전시킨 김마리아의 리더십은 개인적 출세와 권력 추구와는 거리를 두고 오직 여성들의 실력양성과 협력, 연대를 통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지도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상도 교수 / 호남신학대학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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