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과 안전이 입 맞추는 공동체
[ 특집 ]
작성 : 2019년 01월 14일(월) 12:02 가+가-
사회 변화와 한국교회의 과제(1월 특집) ③감정대리인이 필요한 시대, 교회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김용성 화백의 '핸드 오브 갓(Hand of God)'

요세푸스는 '음부론'에서 천국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은 여행하기에 힘이 들지 않을 것이며, 보행자들이 그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든 바다의 무서운 파도 소리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그때가 되면 의인들은 쉽게 바다 위를 걷게 될 것이다." 고대까지 갈 것도 없다. 중세만 해도 여행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이제 현대인들은 무서운 파도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고, 베드로처럼 스승을 바라보며 바다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걸음마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구름 위를 날아다니면 된다. 머리만 떨구면 긴 잠을 잘 수 있는 축복받은 체질이면 몇 시간도 순식간에 건너 뛸 수 있다. 인천공항이 서울역만큼이나 희소성이 떨어지는 지금, 현대인들은 고대 역사가가 묘사한 의인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위험이 분리되자 사람들은 그것을 동경하거나 심지어는 만만하게 보게 되었다.

그런데 변덕스러운 바다 위를 건너야 했던 과거 여행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 '감정'일지 모른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사랑에는 아픔과 분노라는 고단한 감정이 동반된다고 한 시인은 말한다. 거국적인 주제를 떠올릴 것도 없다. 소위 '썸'만 타도 죽을 지경이다. 설렘, 혼란스러움, 불안이 동시에 움직인다. 머리는 아무리 '거기까지'라고 명령해도, 가슴은 무모하다. 그냥 돌진이다. 삐끗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심연으로 추락이다. 영악할 대로 영악해진 인류는 여행을 안전한 상품, 관광으로 만들 듯이 감정에서 야성을 제거하고 있다.

SNS 운영자는 감정으로 보호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현란한 묘기를 제공한다. '대신 화내주는 페이지', '대신 욕해주는 페이지' 등 다양한 감정대행인이 등장하고 있다. '더 이상 느낌은 우리를 물거나 해치지 않아요.' 구질구질한 정서의 악취(?)에 시달릴 필요 없이,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안전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물론, 간접체험의 밋밋함은 감수해야 한다.

솔직히, 교회는 이런 현상에 혀를 차며 개탄할 형편이 못된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 진상할 품목을 선별해 왔다. '감사, 기쁨, 감격, 평안, 행복…' 문제는 우리 안에는 이런 기특한 애들만 있는게 아니다. '분노, 두려움, 불안, 질투, 원망, 시기, 수치심.' 무엄한 녀석들이 하나님을 향할까봐 몇 겹의 바리케이트를 세우지 않았던가?

감정이 다루기 까다로운 이유는 감사와 불만을, 기쁨과 슬픔을, 평안과 불안을 갈라치기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경의 위대한 시인들은 감히 고개를 쳐들고 하나님께 말한다. "주님, 분발하소서."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셨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가장 안전한 분임을 고백했다. 그래서 시한폭탄 같은 위험물을 그분 앞에서 터뜨렸다. 태평양 한 가운데 터지는 폭탄은 더 이상 살상무기가 될 수 없다. 안전이 담보되면 위험은 모험을 향한 거름으로 바뀐다.

감정대리현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긴긴 암흑기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특히, 기독교 문화권인 서구에서) 감정을 누르거나 무시하거나 제거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무의식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각종 증상과 병리가 속출했다. 하나님과 친밀했던 선배들은 모든 감정을 생생하게 느꼈고, 하늘을 향해 표현했다. 다윗은 정적(?) 사울의 피를 손에 묻히지 않을 수 있었다. 왜? 이미 긴긴 시편을 통해 감정을 가득채워서 그분께 일러바쳤으니까.

성경 구석구석 우리가 감정이입해서 따라갈 구절들이 차고 넘친다. 가슴으로 성경읽기는 곧바로 솔직한 기도로 우리를 안내한다. 단, 조급하지 않아야 한다. 한 구절, 한 단어 가지고 하루를 보내거나 몇 날 며칠을 지낼 수도 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겨놓으신 감수성의 세포를 일깨우실 수 있다. 이런 눈으로 말씀을 대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은 감정을 편견 없이 생생하게 느끼고 수용하고 그것을 잘 돌보고 다스릴 능력을 선물 받게 된다. 더 근사한 건 그 범위가 나를 넘어서 타인에게까지 확장되고, 그 영역이 닿게 되면 그 수혜자들은 이웃이 되고, 또 다른 가족이 된다. 이걸 상담이라고 한다.

목회상담을 하는 사람으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상담을 하게 되면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지 않나요?" 참 지루한 질문이다. 안타깝게도 교회를 떠나는 교우들이 있다. 설교에 시험 들어서, 구역원들과 갈등으로, 심지어는 중직자 선거에서 떨어져서. 다양한 이유들이다. 본질을 벗어난 설교, 구역원들간의 미성숙한 관계, 섬기는 직분에 대한 오해가 원치 않는 결과를 낳듯, 설익은 상담은 목회를 어렵게 한다. 상담은 다른 사람의 비밀을 밝혀내는 게 아니다. 그 마음의 이야기를 진주처럼 소중하게 듣는 것, 그 비밀이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 그렇게 느껴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 '내가 돼지에게 내 진주를 던지지 않았구나' 이런 안도를 들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교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못해서 교회와 작별하는 경우는 봤어도 잘 들어줘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경우는 없었다. 모든 목사가 말씀 선포자이듯, 목사는 교인들과 만나는 사람이고, 거기서 '마음의 언어인 감정을 들어주는 사역'이 펼쳐진다. 감정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지도 말고, 억지로 보내려고 하지도 않고 수용하는 것이다. 이걸 상담이라고 한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위험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영적 여정들이 쌓여서 안전한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내 안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굉장히 좋은 다리가 감정이다. 이 감정과 만나는 영적 모험은 함께 가야만 한다. 당연히 그런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어야만 한다.



* 내면아이 치유전문가 휘트필드가 제시하는 안전한 사람 식별법(이건 안전한 사람이 되는 법이기도 하다.)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독단적이거나 비판적이지 않는 사람/ 쉬운 해결책이나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사람/ 나의 욕구(경청, 안전, 존경, 이해)를 채워주는 사람/ 스스로 감정에 정직한 사람/ 당신을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데 이용하지 않는 사람/ 함께 있는 것이 비교적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끼게 하는 사람'



김창호 목사

소일교회·(사)한국가족상담협회 이사


[1월 특집] 사회 변화와 한국교회의 과제
1. 사회의 변화 속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개인욕망 추구 사회에서 새 공동체 추구 2018.12.31.
2. 교회도 카멜레존 시대가 시작됐다 소비적 공간을 사귐의 공간으로 2019.01.08.
3. 감정대리인이 필요한 시대, 교회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모험과 안전이 입 맞추는 공동체 2019.01.14.
4. 밀레니얼 가족, 가정의 변화와 교회의 대응 "교회, 가정의 신앙양육 기능 도와야"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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