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연설가에서 민족운동가로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9년 01월 08일(화) 08:20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6. 안창호 <2>

도산 안창호의 청년시절 모습.

안창호는 구세학당을 다니면서 근대학문을 접했다. 구세학당은 초등교육과정이어서 깊이 있는 학문에 이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선교사로부터 얻게 되는 엷은 지식을 통해서도 자신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즉 다른 나라의 간섭과 침략으로부터 자주적으로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의 힘은 '덕(德)을 지니고 지(智)를 겸비한 나라의 백성'이 많아질수록 커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신분적 질서가 엄격한 사회였다. 백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든지 지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필요한 때였다.

그때 마침 서재필, 이상재,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1896년 7월 2일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웠다. 그리고 한글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독립신문'은 한글로 쓰였고 한 부를 가지고 여러 명이 돌려보기도 했기 때문에 '독립신문'에 실린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다. 그래서 백성들이 나라 안팎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이에 더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외세가 조선의 주권을 위협하면서 각종 이권들을 탈취하려는 움직임을 정면으로 고발하고 비판했다. 독립협회 운동은 나라의 자주독립과 부강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만민공동회로 이어졌다. 근대적 시민운동이 발현한 것이다.

때를 같이 하여 안창호는 독립협회에 투신하였다. 이듬해 그의 동지 필대은 등과 더불어서 독립협회운동 평남지회를 결성하였다. 이윽고 독립협회 평남지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가 평양 쾌재정에서 열렸다. 평양감사 조민희(趙民熙)와 수백 명의 평양시민이 모인 자리였다. 여기서 안창호는 자신을 명연설가로 유명하게 만든 이른바 '쾌재정 연설'을 하였다.

"(중략) 세상을 바로 다스리겠다고 새 사또가 온다는 것은 말뿐이다. 백성들은 가뭄에 구름 바라듯이 잘 살게 해주기를 쳐다보는데 인모 탕건을 쓴 대관, 소관들은 내려와서 여기저기 쑥덕거리고 존문만 보내니, 죽는 것은 애매한 백성뿐이 아닌가? 존문을 받은 사람은 당장에 돈을 싸 보내지 않으면 없는 죄도 있다 하여 잡아다 주리를 틀고 돈을 빼앗으니, 이런 학정이 또 어디 있는가. 뺏은 돈으로 허구헌 날 선화당에 기생을 불러 풍악을 잡히고 연관정에 놀이만 다니니, 이래서야 어디 나라꼴이 되겠는가? (후략)"

스무살 청년이 토해내는 사자후는 쾌재정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자리에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도 있었다. 그들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민족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안창호의 진면목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연설에 머물지 않고 그의 사상과 실천에 있었다.

안창호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교육학을 배우기 위해 189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학업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조선인들의 애처로운 처지를 보고서 모른 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조선인들의 힘을 기르기 위한 조선인의 친목단체를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친목단체 및 권업단체를 넘어서서 1905년 공립협회(共立協會)로 전환되었다.

이윽고 미국에서 구상한 새로운 시민운동단체를 국내에서 건설하기 위해 1907년 내한했다. 즉 신민회(新民會)가 그것이다. 신민회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백성' 즉 근대적 시민의 모임임을 표방하고 있다. '신민(新民)'이라는 용어는 앞으로 안창호 특유의 실력양성운동과 공화주의 사상의 핵심적인 개념이 될 것이다.

이치만 교수 / 장신대,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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