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의 삶과 신앙, 디지털로 읽는다
본보 아카이브로 본 추억의 성탄절
작성 : 2018년 12월 17일(월) 15:48 가+가-

본보 1970년 성탄절호에 실린 원곡 김기승 선생의 휘호.

올해 제작시스템 업그레이드를 통해 종이신문의 가독성과 온라인신문의 신속성을 업계 최고 수준으로 향상시킨 본보는 72년 역사를 디지털화하는 아카이브(Archive) 제작도 진행하고 있다. 세로쓰기, 한문혼용, 지질훼손 등으로 판독이 어려운 1946년 창간호부터 최신 신문까지, 제목은 물론이고 본문까지 모두 텍스트화하는 이 작업을 통해 독자들은 총 4만여 쪽에 달하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언제 어디에서나 열람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된다. 2018년 성탄절을 맞아 지금까지 제작된 아카이브 데이터를 활용, 1950~1970년대 성탄 기사들을 찾아봤다.



#1952년, 전쟁 중에도 성탄의 기쁨 전해

본보에 성탄 관련 기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다. 12월 22일자 성탄호 사설은 "금년도 전쟁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됐다"고 한탄하며, "자녀에게 기념선물은 못 줄지라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신 사실을 밤새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당시 필자들은 해외에서 들려오는 평화의 외침을 부러워하며, 전쟁의 아픔을 한탄한다. "우리 한반도에는 천사의 멜로디 대신 대포소리가 울려 옵니다. 38선 위에는 지금 허다한 청춘들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전쟁은 죄악입니다. 전쟁 도발자는 교만한 사탄이요 반역자요 인류의 원수입니다."

휴전 후 성탄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게 되면서, 본보는 먼저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교회와 기독교 언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1951년 성탄, 부산에서 속간돼 두 돌을 맞은 본보는 1953년 12월 28일자 사설에서 "본보는 많은 동지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사명에 충실했다고 할 수 없으며 소기의 목적을 거뒀다고도 할 수 없다. 다만 혼탁하고 복잡한 시기에 바른 신앙을 지향하는 도표가 되며 정의를 높이는 목탁이 되려는 염원 뿐이었다. 오늘의 미숙을 자인하며 내일을 기약하고 일보를 전진하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본보는 상처를 회복해가는 한국사회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전한다. "크리스마스. 하나님이 죄진 인간을 구원하시려 참 사람이 되셔서 오신 이날.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된다면 하루의 휴전이 한달, 다시 한해로 연장되어 참된 세계 평화가 실현됐을 것이다. 노아 홍수도 하나님 섭리 가운데 일어난 것을 생각하며, 우리가 당한 이 멸망의 자리에서 이제 아버지를 대하는 어린이의 마음을 가졌는지 반성해 보자. 우리 어린이로 돌아가자. 어린이를 안고 축복하시는 주님께로 돌아가자."



#1955년 당시 총회장 한경직 목사 성탄 메시지 실려

1950년대 본보는 송년호보다 성탄호에 더 비중을 둔다. 평화, 사랑, 구원, 기쁨의 메시지가 꼭 필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55년 12월 26일자 신문엔 당시 총회장이던 고 한경직 목사의 '사랑의 크리스마스'라는 메시지가 실렸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신 날입니다. 사람은 배반하고 거스르고 악의 길로 나아가되 하나님은 세상을 잊지 못하시고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신 날입니다. 그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합니다. 그 크신 사랑을 좀 배워야 겠습니다. 교우들끼리 좀더 사랑합시다. 어려운 문제들이 많으나 크리스마스의 사랑으로 해결치 못할 문제가 없을 줄 압니다. 크리스마스는 사랑의 날입니다."

연말인만큼 매년 회고와 반성의 목소리도 빠지지 않았다. 1957년 12월 23일자 '송년단상'에는 "오늘의 신자나 교회가 과거의 찬란한 역사를 계승할 자격을 구비하고 있는가 반성해 볼 것이다. 우리가 과연 사회에서 악을 제거하고 부패를 방지할 실력을 지니고 있는가, 시기, 분열, 투쟁, 살육을 일삼는 현실을 바꿀 수 있겠는가. 아니면 현실에 휩쓸려 협조하고 선동하면서 그리스도인보다 더 속화된 인간은 없다는 불명예를 초래하고 교회 무용론에서 교회 말살론까지 조성하게 만드는 것이 교계의 현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1958년 12월 22일자엔 변해가는 교회 성탄 행사를 한탄하는 투고가 실렸다. "뽀드득, 고향의 눈길은 소리가 났다. 천사의 행렬인듯 숨소리조차 죽여가면서 우리들 새벽 찬미대는 걸었다. 호롱등불에 눈길을 밝히며 미리 확정된 구역 요소요소에서 말없이 멈춰서고는 찬송을 불렀다. 이 때 창문의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내다보기도 했다. 그가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서 찬송가 4절을 다 부른 후 다시 눈위를 걸었다. 어느 집에선 행렬을 따라 나서기도 했다. 교회 제직들은 쌀과 고기를 한 봉지씩 잘 싸서 가난해 보이는 집 앞에 아무도 모르게 놓아뒀다. 아침엔 축하예배에 이어 노인잔치가 열렸다. 한쪽에서는 걸인잔치도 열렸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성탄절이다. 그런데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요즘은 새벽 찬미대가 각기 자기 교인들 집만 찾아 한절씩 부르고 떠난다. 서울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다. 깡패 ,주정꾼, 도박꾼, 거기에 새벽 찬미대를 가장한 걸일들까지, 술집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철야난무하는 처참한 모습이다."



#4.19혁명, 5.16군사정변 당시 '사회 참여' 메시지 전해

독재에 항거해 정권교체를 이뤄낸 4.19혁명이 발생한 1960년 12월 26일자 1면엔 당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장이던 현 장신대 주선애 명예교수의 '낮아짐이 평화의 길' 제하의 글이 실렸다. "우리는 많은 피를 보았고 무수한 군중의 아우성을 들은 까닭에 금번 크리스마스는 기어코 엄숙하고 뜨거운 기도로 맞이해야 겠습니다. 왜 이 지구는 소란하고 진동하며 백성들은 평화를 찾다가 쓰러져야 하는 것입니까? 종의 형체를 입으신 그가 곧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을 흥분된 오늘의 인민은 까마득히 잊고 있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평화의 길이며 희생하는 것이 삶의 길이라는 진리가 우리의 굳어진 심장을 터뜨리고 되살아나기까지 엄숙히 꿇어 앉아 기도로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합시다."

1963년 12월 23일자 강신명 총회장의 성탄 메시지는 1961년 5.16군사정변과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치른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참여 촉구로 끝을 맺는다. 당시 교세는 2000여 교회, 40만 성도였다. "사회와 민족이 교회를 도외시하고 백안시하고 있다. 정의와 복지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조차도 교회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먼저 교회부터 연합하고 통일하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이때 우리 교회는 신앙으로 단결하고 나아가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겠다. 오는 해는 통합하고 하나돼 영광스런 해가 되길 바란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본보의 성탄 특집도 다채로워져, 매년 들어가던 성탄메시지 및 사설에 추가로 좌담회, 10대 뉴스 등이 등장한다. 1965년 12월 25일자 신문엔 교회가 지향해야 할 성탄절 행사에 대한 좌담이 실렸다. 당시 좌담에 참석한 고 방지일 목사는 바람직한 성탄 프로그램으로 어린이와 함께 드리는 온교인 새벽예배를 추천한다. 선교사들로부터 전파된 성탄 문화의 토착화를 고민하던 참석자들에게 방 목사는 성탄이 가족이 함께 하는 명절로 자리잡도록 노력할 것을 제안했다. 참석자들은 좌담을 통해 성탄절엔 예배에 중점을 둘 것, 개인적 또는 연합해 구제활동에 힘쓸 것, 한국적인 흥겨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할 것 등으로 의견을 모았다.



#70년대 북한동포 사회약자에 관심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 동포들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 1971년 12월 25일자에 실린 당시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의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여러분이 살고 계신 북한은 기독교를 먼저 받아들여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조했지만 오늘 박해를 받고 있는 북한 교회와 신자들을 그려볼 때 아픔을 금할 길이 없다"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북한 전역을 비춰 속히 평화가 임하길 염원했다. 1972년 12월 23일자에선 "예수님이 가난한 자, 눌린 자, 불쌍한 자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강조하며, 빈곤층이 모여 있는 지역을 소개하고 도움을 호소했다. 가장 먼저 소개된 지역은 중량교를 중심으로 남북 하천변에 모여있는 300여 호의 판잣집. '주민은 약 1500백 명, 들고 나가는 이가 많아 정확한 계수가 어려우며, 대부분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는데 막노동, 채소장사, 행상, 리어카, 껌팔이, 봉투붙이기가 직업이며, 하루 몇 백원 버는 것이 고작'이라고 적었다. 청계천 송정동 일대 3000여 호의 판잣집은 '전기와 상수도 시설이 없고, 당장 끼니가 곤란한 지역'으로, 이 외에도 망원동 빈민촌, 성남시 산64번지와 85번지 등이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소개했다.



#유신헌법 시절 성탄절, 구속자 석방 촉구

유신헌법 시절인 1974년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했던 대통령 긴급조치 구속자 석방을 촉구하는 총회 차원의 움직임도 포착된다. 12월 14일 연석회의를 연 총회 임원, 증경총회장, 전국 노회장, 총회 각부 총무들은 성탄전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는 대통령 건의문을 작성했다. 문건에는 구속자들을 성탄 전에 석방시켜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할 것, 강제 추방된 미국 감리회 조지 오글 목사 추방령을 해제하고 선교활동을 허가할 것 등으로, "그리스도인은 국가 권력을 하나님이 주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역사통치 원리를 이탈할 경우 그 시정을 촉구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가적으로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던 시절 총회는 '새마음 운동'을 촉구했다. 1976년 12월 25일자는 성탄절 메시지에서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서나 새마을운동이 맹렬하게 벌어져 눈부신 성과를 거두 있다. 외부로 나타나는 모든 운동도 필요하고 귀한 일이겠으나, 이런 운동의 밑바닥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모시는 새마음운동이 자리잡도록 교회가 함께 노력하자. 모처럼 만들어진 새마을 안에 묵은 마음, 썩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대로 살게 된다면 얼마 안가서 다시 전체가 묵은 마음, 썩은 마음으로 바뀌어지고 말 것이니, 우리들은 새마음운동도 같이 벌여나가야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한다.



#70년대 WCC 총무 성탄 인사, 오두산 성탄트리 점등식 보도

1970년대에는 타교단은 물론, 세계교회협의회 총무의 성탄 인사도 자주 지면에 실렸다. 1976년 성탄절 WCC 필립 포터 총무는 제5차 총회의 기도문을 언급하며 "소망의 하나님! 당신의 백성들에게 빛과 능력을 주옵시고 모든 나라에서 당신의 이름을 증거케 하옵시며 모든 권력과 권세에 대항하는 당신의 정의로움을 위해 싸울 수 있게 하여 주옵시고, 당신이 주신 소임을 신념과 신의로 감당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이 없는 우리는 무력하옵기에 우리는 다함께 이렇게 간구하옵니다."

1970년대 후반, 어느덧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세는 80만 명을 넘어셨다. 1979년 12월 22일자엔 서부전선 오두산 정상에 세워진 대형 성탄트리 기사가 실렸다. 이미 세번째 점등식이었지만 행사 참석자들은 크게 감동했다. 당시 평북 의주가 고향이었던 한 권사는 이렇게 고백했다. "분명히 머리가 희끗해진 북한의 노인들은 저 십자가를 보고 성탄의 기쁨을 가슴 속으로나마 되찾을 거예요.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손자들에게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를 해줄 것입니다. 분명이 무언의 복음전도가 이뤄지리라 믿어요."

지난 72년의 한국교회 역사를 디지털화한 본보 아카이브를 통해 어려웠던 시절 선배 기독교인들이 만난 하나님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최근엔 아카이브 제작 소식을 접한 여러 원로들과 다수의 목회자, 평신도들이 그 동안 본보로부터 받은 도움을 밝히며 후원에 동참했다. 본보는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아카이브 작업에 대한 교회들의 관심을 요청하며, 한 페이지 복원 비용 1만원을 후원하는 단체와 개인 후원자도 모집하고 있다.


차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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