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에 지도력 제공…운동 확산 큰 기여
국가의 고난에 동참하며 애국애족한 두 교회, 연동교회와 안동교회
작성 : 2018년 11월 19일(월) 10:38 가+가-

연동교회 사실에는 이 교회서 신앙생활을 한 애국지사들의 발자취가 전시돼 있다. 설명하고 있는 이성희 목사(좌)와 호남신대 최상도교수.

월남 이상재 피택장로에 대해 적혀있는 세례교인명부.
"3월 1일(토) 2시 파고다공원에서 물밀듯이 밀려 나간 군중들이 종로를 휩쓸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이었다. 모자가 공중으로 날고 풍진(風塵 )이 아울러 날으니 걷잡을 수 없는 인산인해를 아무리 독한 경찰이라도 속수무책인 듯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연동교회에 부임한지 두 달,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한 전필순 조사는 이와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한 독립운동은 전국 방방곡에서 일어났고, 특히 서울과 경기지역은 전국 3.1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1919년 3, 4월 두달 간 일어난 시위가 1,100여 건이고 이중 200여 건이 서울을 포함한 경기지역에서 일어났다고 하니, 만세운동의 핵심 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에는 연동교회, 승동교회, 안동교회, 정동교회, 수표교교회, 남대문교회 등 앞장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여러 교회들이 있었다. 그 중에 서울노회 연동교회(이성희 목사 시무)와 안동교회(황영태 목사 시무)는 1919년 3.1 만세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민족교회들이다. 두 교회는 걸어서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2Km 안팎의 거리에 있으면서,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며 애국애족하는 일로 고통 받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한국 기독교인은 3.1운동에 신앙적 결단으로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자로 나섰고, 지도력을 제공했으며, 운동 확산의 조직을 제공하고 통로가 되어 큰 기여를 했다"면서, "이렇게 큰 기여를 한 만큼 교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 애국지사들의 집합소 '연동교회 '



연동교회에 특별히 애국지사가 많이 모여들어 신앙생활을 한 데는 초대 게일 목사의 공헌이 크다.

이성희 목사는 "한국을 무척이나 사랑한 게일 목사는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많은 애국지사를 찾아가 위로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로인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연동교회로 모여들었다"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월남 이상재를 꼽았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이상재는 감옥에서 게일 목사의 전도를 받고 출옥과 동시에 연동교회에서 출옥동지들과 함께 집단 세례를 받았다. 출옥동지들 대부분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과 함께 청년들에게 성경과 신지식을 가르쳤다.

연동교회 사료실에는 그가 당시 살던 곳의 주소, 글의 유무식 정도, 가족 신앙생활 관계 등이 담긴 세례교인 명부가 보관돼 있다.

이성희 목사는 "나라도 교회도 사랑했던 이상재는 장로직을 마다했다. 연동교회가 경기충청노회에 청원한 3인의 장로 중에 포함됐지만, 그는 교회에 국한된 장로보다도 평신도로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원이라고 해서 피택장로에 머물렀다"고 설명했다.

연동교회 출신 정재용 전도사는 파고다공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김마리아를 비롯한 신의경, 오현관, 이정숙 등의 성도들도 연동교회 교인들이었다. 일본의 침략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헤이그에 특파됐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도 연동교회 성도였다.

안동교회는 매년 3월 1일 11시에 모여 기념예배를 드리고,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삼창을 부른다.
전필순 조사는 3.1운동 직후에 조선의 독립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 추진하다, 대동강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를 창립한 김필례,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인 이갑성, 민족대표 48인 중 1인인 함태영 등 모두 연동교회 출신이거나 다녔던 인물들이다. 연동교회의 많은 교인들은 '애국이 곧 신앙'이라는 정신으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교회는 이들의 삶과 정신을 후대에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16인 열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1976년 90세의 나이로 별세한 정재용 장로(당시 33세로 전도사)는 '독립선언서 낭독은 계획에 없는 돌발 적인 것이었다'고 했다. 민족대표 33인이 갑자기 태화관으로 옮겨갔고, 3,4천명의 학생과 군중들이 파고다공원 내 석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예정에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조선'이라는 두 글자를 덧붙여 '조선 독립선언서'를 외침으로 낭독을 시작했던 것이다. 정재용 전도사가 선창한 "조선 독립 만세"는 곧 군중들의 함성으로 이어졌고,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민족적 의거의 시발이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민족교회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는 길에 동행한 호남신대 최상도 교수는 "독립운동은 억압과 핍박에 저항하는 운동이었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앙운동이었다"며, "민족의 운명과 교회의 운명을 같이 본 수많은 교인들이 참여했으며, 교회안에서 활동하던 조사와 전도부인들이 3.1운동 확산에 큰 역할을 감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가 얼마나 역사에 관심이 있고, 그 역사를 교인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가는 애국애족정신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며, "민족의 거대한 운동이었던 3.1운동의 거점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는데도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지역사회와 단절돼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 지금도 3월1일엔 '대한독립만세' 외치는 '안동교회 '



안동교회 2대 목사인 김백원 목사는 1919년 3월 1일 거사가 있은 지 얼마 안된 3월 12일,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 등과 함께 '12인 등의 장서'라는 문서를 만들어 한 통은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보내고, 한 통은 종로 보신각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낭독했다.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는 '12인 등의 장서'는 2001년에 발간된 안동교회 90년사 속에서 볼 수 있다. 그 서신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길래 이를 작성한 김백원, 차상진 목사가 감옥에 갔을까. 국한문 혼용의 고어로 적힌 '12인 등의 장서' 내용이 궁금했지만, 기자가 쉽게 파악할 수 없자 담임 황영태 목사와 사료실 국장 권혜순 권사가 도움을 줬다. 쉬운 언어로 옮기고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류금주 박사(안동교회 협동목사)의 감수를 거쳐 보내져 온 '12인 등의 장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만강의 충정으로 감히 한마디를 각하에게 주노라. 지난 3월 1일 조선민족대표의 조선독립에 대한 선언서는 결코 몇 사람의 독단 결정에서 나온바 아니요. 실로, 전 조선민족의 양심적 요구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에 우리는 그 뒤를 물려 받은 자로서 이천만의 요구, 주의를 대표하여 이를 관철코자 하노라…조선의 독립은 민족 요구의 정의 인도이며 대세 필연의 공리천칙으로 우리는 자신하노라 …민족이 무력으로 자립하지 아니하고 인도 정의로써 자존자보케 된 이상 오늘 우리의 독립선언이 어디에 모순이 있으며, 어디에 이치에 어그러짐이 있으리오…우리의 이번 거사를 경고망동이라고 단언치 말지어다…만일 일시적인 수단과 방편으로 무력을 써서 이 정의인도의 원천을 막으려 하면 이는 각하의 총명을 위하여 유감일 뿐이라…" 서신의 끝에는 '김백원 차상진 등 십이인' 이라고 적혀있다.

장서를 작성하고 낭독했던 김백원 목사와 차상진 목사는 1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1920년 6월 15일에 개회된 제18회 경기충청노회에서 경서시찰은 '1년간 수감되었던 목사 김백원과 차상진이 출옥된 것을 감사한 일'로 보고하고 있다.

우국지사들이 거사를 도모하는 일에 이 교회 박승봉 장로의 집이 주로 사용됐다.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 외에도 함태영, 김필수, 장붕 등이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은 그 광경을 목격했던 박 장로 아들 박용서(당시 15세)가 쓴 '월남 선생과 삼일운동'이란 글에 나타난다.

박승봉 장로의 집에서는 3.1운동을 여러 차례 모의했고, 독립선언문의 초안도 이 집에서 작성했다고 알려진다. 독립신문 간행을 위한 자금 조달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등 박 장로는 3.1운동 배후 인물로 활약했다.

당시 안동교회 설립의 주역들은 신앙과 교육을 통해서만 나라의 미래가 있다고 확신했다. 박승봉 장로는 "기독교가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야만 백성들을 빨리 깨우칠 수 있다"면서, 유성준 등과 함께 기호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양반 마을인 북촌에서 외국인 선교사의 개입 없이 한국인들만으로 시작한 교회라는 자부심과 민족교회로서의 역사성은 지금도 이어진다.

매년 3월 1일 11시엔 안동교회에서는 찬송가와 함께 애국가가 울려퍼진다. 3.1절 기념예배에선 독립선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한다. 예배 후엔, 1919년에 있었던 3월 1일의 함성 그대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황영태 목사는 "역사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기억하고 그날을 기념할 때 가야할 길을 찾는 것"이라면서, "내년 100주년을 맞아서는 조금더 특별하게 기념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어 황 목사는 "우리교회는 민족을 위해서 세워지고, 우리나라 자본으로 세운 민족을 위한 교회라는 자부심이 있다. 기차역이 세워지는 곳마다 교회와 학교를 짓자는 운동을 펼쳐갔다. 개화파 사대부들이 세운 교회라 교회안에서도 상당히 개혁적인 움직임들이 많았다. 교단 최초의 여성장로도 여기서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남강 이승훈 장로는 일제의 재판정 앞에서도 당당하게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었는데 우리는 이 존귀한 자유를 남에게 빼앗겼다. …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적의 칼에 쓰러질지언정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남에게 이끌리는 짐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이번 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가의 질곡과 나란히 걸어간 교회와 신앙선배들의 발자취를 보며, 현재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는 일은 개교회 차원을 넘어 교단적으로도 쉬지 않고 계속 연구, 발굴해 내야 할 과제로 보인다.
이수진 기자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