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여학생들이 시작한 부산의 3.1운동
부산지역
작성 : 2018년 10월 24일(수) 17:21 가+가-
【부산=최샘찬 기자】 "부르시오! 만세를 부르시오,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1일 부산 좌천동 거리. 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부산에서 들린 첫 만세운동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어린 여성의 목소리였다. 일본 군경들에게 검거 당해 취조를 받을 때도 한 여학생은 "세 살 먹은 아이도 먹을 밥을 빼앗기면 돌려 달라 우는데 우리들이 빼앗긴 내 나라를 돌려 달라 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며 매섭게 항의했다.

부산지역 3.1운동의 첫 시작은 부산진교회의 자매 학교인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였다. 3월 10일 늦은 밤 고등과 학생 11명은 벽장 속에 숨어서 태극기 50여 개를 만들었다. 3월 11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은 저녁 식사 후 주경애 박시연 선생의 지시를 기다렸다. 밤 9시가 되자 2명의 선생이 앞장 섰고 11명의 학생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기숙사를 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만세 시위는 약 2시간 동안 계속됐다. 이에 당황한 일본 군경은 시위 주동자를 찾아 두 선생과 11명의 학생을 검거했다. 이들은 취조를 받고 부산 감옥에 수감돼 부산지법의 판결을 받았다. 결국 두 선생은 1년 6개월, 11명의 학생은 6개월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다.

당시 옥고를 치뤘던 학생인 김반수 동문은 이날 상황을 글로 남겼다. "3월 1일 독립만세를 전국에서 부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이때다 싶어 일신여학교 동지 몇 명이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장만해 둔 혼수감 옥양목을 몰래 기숙사로 가지고 갔습니다. 창문에 이불을 가리고 옥양목에 붉은물 검은물로 칠해 겨우 마련한 태극기를 들고 3월 11일 밤 8시경 거리로 가지고 나가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나눠 주어 목이 터지라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부르다 부르다 지쳐 쓰러지면 또 용기를 내어 불렀습니다. 결국은 일본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지요. 그때는 여자로서 부끄럽다거나 무섭다기보다는 우리나라를 되찾자는 일념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수모를 당해가면서도 항의를 했습니다. 결과는 옥살이었지요."

기자는 부산 지역 최초의 만세 운동이 일어난 현장을 찾았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기에 어린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며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을까. 부산진교회를 올라가는 언덕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친구여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의 문구 사이 호주 선교사들의 모습과 이들의 헌신적인 삶이 기록돼 있다. 그 위로는 부산진교회와 부산진일신여학교가 마주보고 있었다.

부산 지역 3.1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진교회의 자매학교였고 부산진교회의 교인들이 많이 속해있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3.1만세운동에 앞장서 옥고를 치룬 일신여학교 박시연 교사가 부산진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였다는 사실이 1917년 6월 2일 부산진교회 당회록에 기록돼 있다. 또한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 부산진교회 바로 앞 좌천동 거리에 게시물은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부산진일신여학교 8명의 여학생이 부산진교회에서 세례받은 학생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부산진교회 100년사는 3.1운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3.1운동의 기독교적 참여는 교회의 참여라기보다 기독교인 각자의 신앙적 결단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당회록에서 특별한 기록을 하고 있지 않다. 이는 한국교회 총회록이나 노회록에서도 간략한 상황보고만 한 것처럼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진교회의 교인과 교회와 관련된 기관이 주축이 됐다는 점이 부산진교회의 3.1운동 참여도를 말해주고 있다.'

부산진교회의 초대 당회장 왕길지 목사(겔슨 엥겔)은 부산진일신여학교의 2대 교장을 역임했고 부산진교회의 3대 당회장인 매견시(제임스 맥켄지) 목사는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설립자였다. 이는 교회와 학교의 가까운 관계를 보여준다. 3.1운동 현장의 구체적인 역사적 자료들을 살펴보기 위해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의 도움을 받아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 안에 구성된 기념전시관을 방문했다.

1895년 호주장로교선교회 여자전도부에 의해 설립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건축학적 가치와 삼일운동 진흥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부산광역시로부터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받고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기 위해 2006년 건물을 보수 정비했다. 이후 2009년 내부에 기념전시관을 설치해 당시 교실을 재현하고 다양한 유물 전시를 통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왔으며 2010년 총회 한국기독교사적 제6호로 지정됐다.

탁지일 교수는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역사와 함께 3.1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어린 여학생들의 3.1만세운동은 선교사들의 민족 의식 교육에서 출발했다고 강조했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역사와 관련해 탁 교수는 "호주장로교회 여전도회가 파송한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덕배시)가 1890년 사망하자 호주에서 5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중 4명이 여성이었고, 이는 양반층 관료층이 아닌 아래에서부터 여성, 여성 중에서도 어린아이, 어린아이 중에서도 고아부터 선교가 시작됐다"며, "이들은 1895년 좌천동 소재 산간초가에서 개교하고 초가집 고아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들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한강이남지역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로 발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민족의 식 교육과 관련해 탁 교수는 "여성들에 대한 교육이 미래의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필요하다고 판단해 성경과 영어 이외에도 역사 지리 수학 식물학 등 다양한 민족교육을 통해 부산지역의 최초의 독립 만세시위가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며, "어린 여학생들은 다양한 근대교육을 받고 역사의식을 가졌으며, 이들은 어리고 충동적인 단순한 감정적인 시위가 아니었다. 선교사들의 민족교육의 결과가 민족을 위한 시위로 이어진 점은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부산지역 3.1운동 현장을 방문하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훌륭한 역사적 자료들이 준비돼 있으나 이를 소개하거나 유지 보수 작업이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가이드를 진행할 인력이 부족해 부산노회 사무국장이나 탁지일 교수가 직접 안내를 하고 있다. 또한 2006년 보수 이후 10년 넘게 방치돼 죽은 나무, 낡은 처마, 물받이 동철판의 노후, 문틀 등의 보수 작업이 필요하지만 개노회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어 재정적 어려움으로 보수 작업이 쉽사리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세대들이 앞으로 3.1운동에 대해 공부하면서 기독교의 역사를 알아가기 위해 귀중한 역사 자료들이 잘 보존 관리돼야 할 것이다.
최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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