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자유를 향한 여정
[ 8월특집 ]
작성 : 2018년 08월 20일(월) 10:43 가+가-
교회, 페미니즘을 읽다3
신학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여성과 신학 그리고 기독교교육이란 주제로 과목을 개설한 적이 있다. 기독교 여성의 위치를 점검하기 전에 먼저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학에서 다루는 주요 개념과 이슈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는데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상당히 힘들어 했다. 남성들의 삶도 고달프고 만만치 않은데 왜 여성들은 자기들만 차별받고 있다고 소리를 내는 것이냐는 불만도 있었고, 차별을 드러낸 역사적 기록물을 함께 공부했음에도 여성이 차별 당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남학생 때문에 힘들어 하는 여학생들도 목격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른다. 반면에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고 성차별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는 과연 페미니즘에 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사고와 언어 및 행동에 깊게 뿌리박힌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을 중심에 두고 교회에서의 교육 및 실천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는 바이다.

첫째, 페미니즘이 무엇인가에 관한 소개와 이해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반(反)남성주의,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상위를 주장하는 운동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물론 페미니즘 안에도 여러 입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억압과 착취를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라는 의미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즉 어느 한 성이 다른 한 성을 지배하거나 지배 받는 것이 아닌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인정받는 것을 구현하는 것이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바이다. 결국 페미니즘은 인간 존재, 인간존중의 문제이며 인간에 대한 이해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존엄과 동등의 관점에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다루어야 하지 않겠나?

여성의 정체성 및 역할에 관한 언급은 대부분 사회적 구성물이다. 즉 남성우월의 환상을 만든 것은 여성의 열등한 교육과 훈련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는 성별에 관계없이 대부분 축하를 받는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점차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특성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며 제한된 모습으로 살아간다. 성차별에 의해 남성도 사실은 비인간화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성차별을 사회문화적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고 페미니즘 교육에 대해 반드시 숙고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페미니즘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셨고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하나님 나라는 배타적으로 저세상적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통치의 실현, 즉 인간의 자유, 정의, 평화, 생명에 대한 추구라는 상황 속에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관해 교육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교육하는 것과 떼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교육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주님으로서 강조되어 왔고 예수님이 설교하신 것,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와 교육은 부족했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되고자 한다면 그 나라의 가치들을 전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 가치들을 교회의 구조 속에서 구체화시켜야 하지 않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고 복음을 전파한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다면,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육의 목적에 포함되어야 하고 이런 맥락 속에서 페미니즘도 다루어지고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상대방을 인격체로 존중하는 언어사용과 양성 평등한 언어를 생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어가 실재를 만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고로 연결되고, 사고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말을 하는 것은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상에서 성역할 고정관념과 관련된 언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예를 들어, "너는 여자니까" 분홍색 치마를 입어야 해 혹은 "너는 남자니까" 인형보다는 로봇을 가지고 놀아야 해 라는 말 대신에 "너는 분홍색이 잘 어울리니까" 또는 "너는 로봇에 관심이 많으니까"라는 식으로 단어 사용이 변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예배의식, 기도나 이야기 혹은 찬양 등에도 의도적인 양성 평등언어 선택을 반영하는 실천도 필요하다. 또한 친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신체 접촉하지 말며 거리를 두고 존중하는 법도 익혀야 하겠다.

셋째, 비성차별적, 비억압적, 비가부장적 관점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서 속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고, 성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성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성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인용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과 다른 것이다. 사랑이신 하나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보다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차별을 내세우는 본문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차별과 억압, 비인간성의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것이리라.

넷째, 페미니즘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억압해도 괜찮다는 암묵적 승인이 들어있는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는데, 그 저변에 깔려있는 이분법적 사고에 도전하고 유연한 사고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인간과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한 쪽에는 우월성을 다른 한 쪽에는 열등성을 부여하는 이분법적 경향은 사고의 폭을 제한하여 파괴적이고 왜곡된 형태의 지식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타인의 삶의 세계를 통해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 일뿐 아니라 곧 나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므로 다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창의적이고 열린 사고가 격려되어야하고 또 이를 위한 실천이 요청된다. 엉뚱한 대답, 기이한 질문 좀 하면 어떤가? 예수님이 제시한 비전을 꿈꾸고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만 있다면.

다섯째, 의사소통이 없으면 진정한 교육이 불가능하다. 배움과 가르침에는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므로 일방적 가르침이 아닌 토론과 같은 교수방법의 실천이 요청된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 및 공과공부 현장에서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공과 공부 진도를 나가야 한다는 이유로, 더 많이 알려주어야 한다는 거룩한 찔림(?) 때문에 일방적인 교수가 우세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교육의 의미와 성경공부의 목적, 그리고 커리큘럼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양육하는 것이며 성경공부의 목적은 성경 속 내용의 암기가 아니라 변화된 삶이고 커리큘럼의 일종인 공과 책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일 뿐 주교재는 성경이다.

생각과 감정의 단순한 교환인 대화는 토론과 다르다. 토론은 나의 주장을 내세워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발달, 이해와 판단과 관련이 있고 학습자로 하여금 다양한 관점을 탐구하게 하고 주의 깊은 경청을 격려함과 더불어 사고와 의미의 분명한 소통을 위한 능력을 발달시키고 공감능력을 향상시키며 동시에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 변혁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교회교육의 모든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기를 기대해본다.

끝으로, 복음의 진수는 자유이다. 생물학적 다름, 기능의 다름, 은사의 다름 등 그 어떤 다름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동등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본다.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성차별하고 성차별에 근거해서 억압하고 폭력을 행한다면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교육의 목적 뿐 아니라 과정과 방법도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하는데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구조 속에서는 앞서 언급한 제안들을 실천하기 어렵다.

교육은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물론 영성 발달도 인간 발달도 상호의존의 여정이다. 교회 지도자에게 의존만 한다면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생활화할 수 없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주체적이고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가야하고, 이를 위해 신앙공동체는 우호적이고 안전한 공간을 제공함과 동시에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각자의 의견을 경청하고 지적할 수 있는 그래서 사람 대접받는 느낌이 들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은주 교수(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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