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으로 울려퍼진 만세운동
광주지역
작성 : 2018년 08월 22일(수) 18:12 가+가-

3.1만세운동 발상지

수피아여학교 커티스메모리얼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2시, 기독교인들과 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학생들은 양림리 교회 윗쪽 작은 언덕길에서 숨겨왔던 태극기를 꺼내어 흔들며 아리랑 노래를 목놓아 부르기 시작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자신의 주장을 외부로 강조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광주 3.1만세운동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기독교들과 학생들, 주민들은 작은 언덕길인 '아리랑 고개'를 넘어 광주천을 따라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양동시장)로 향해 내려오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마침 장날이어서 이날 모인 사람들만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를 휩쓴 만세물결은 서문통(지금의 우체국 앞길에서 황금동으로 가는 길)을 지나 법원 앞을 거치고 경찰서 앞까지 진행했다. 학생들은 2.8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고 지도자들은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장날에 모여든 1000여 명의 군중은 너나 할 것없이 일제로부터 당한 수모를 되갚아주기라도 하듯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시작된 3.1만세운동은 4월말까지 계속 이어갔다. 처음 아리랑을 부르던 곳은 광주 3.1만세운동 발상지가 됐고,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묵비석공원이 옆에 조성돼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아리랑 고개와 3.1만세운동길'이라고 부른다.



유진벨 선교기념관
독립운동가 윤형숙과 수피아여학교

3.1만세운동이 점차 거세게 확산되자 일제는 시위행렬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총과 칼을 동원해 유혈진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 기마병의 총과 칼 앞에서도 이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수피아 여학생 윤형숙은 일본 헌병의 군도에 태극기를 흔들던 왼팔이 잘려나가는 참변을 당했다. 비록 한 쪽 팔이 잘려나갔지만 조국을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윤형숙은 다시 일어나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잡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국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을 때 그녀는 이름을 '윤혈여'라고 말할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던 여성이었다.

윤형숙은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오른쪽 눈마져 실명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한 송인동 교수(호남신대)는 "독립운동을 펼치다 형을 받고 출옥한 여학생들은 연고지에 머물 수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면서 "윤형숙은 출옥 후, 결혼도 하지 않고 청년을 대상으로 문명퇴치와 항일의식을 함양시키는 일에 앞장섰다"고 소개했다. '외팔이 여선생님' '제2의 유관순'으로 불렸던 그녀는 1950년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북한군에 의해 피살되면서 조국만을 생각했던 그의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광주 3.1만세운동을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독립운동가 윤형숙을 배출한 수피아여학교다. 1908년 유진 벨 선교사가 교인의 자녀를 교육할 목적으로 설립한 수피아여학교는 1911년 미국인 스턴스가 여동생 스피어를 기념하기 위해 기부금으로 3층 교사를 건립하면서 교명을 수피아여학교라고 불렀고 3.1운동 때 제1회 졸업생으로 교사였던 박애순의 지도로 만세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특히 수피아여학교 교사인 박애순은 제자들에게 조국의 독립에 대한 생각을 불어넣는 일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3.1만세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학생들에게 직접 나눠 줬던 인물이었다. 그 교사의 제자들 답게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수피아홀에서 비밀리에 치마를 뜯어 태극기를 제작해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날 3.1만세운동으로 인해 수피아 교사와 학생 23명이 옥고를 치렀다.

수피아여학교엔 독립운동가 김필례와 김마리아가 교사로 학생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결국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폐교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현재 수피아여자고등학교 대강당 앞엔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3.1만세운동 기념 조형물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 광주 3.1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동상이다. 기념 동상 뒷면에는 1919년 당시 수피아 교사와 학생들 중 16세 이상으로 일제에 의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옆면엔 '역사의 별이 되어'라는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독립운동가 남궁혁과 숭일학교

사실 광주 3.1만세운동 거사는 5일전부터 양림리 교회 남궁혁 장로의 집에서 비밀리에 준비돼 왔다. 당시 광주숭일학교 교사이면서 광주 북문외교회 2대 장로였던 남궁혁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2년전인 191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평양을 오고 가면서 여러 소식을 접하고 3.1운동 거사를 위한 모의 장소로 자택을 제공했다. 그러나 결국 모의 장소가 탄로나면서 일제에 검거돼 1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3.1만세운동 거사를 준비하던 남궁혁 장로의 집은 현재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기 때문에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남궁혁의 독립운동과 함께 그가 교사로 근무했던 숭일학교도 3.1만세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08년 유진벨 선교사가 교인들의 자녀를 교육할 목적으로 설립한 숭일학교는 3.1운동 때 교사와 전교생이 만세운동 선봉에 나섰다. 그 결과 25명이 투옥되고 송광춘 학생은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하는 등 숭일학교는 독립운동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1937년 수피아여학교와 함께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유진벨 선교기념관
양림리 교회와 유진벨

광주에서의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광주 기독교인은 전체 지역민의 2~3%에 불과했지만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수치는 53%에 이를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교회가 '양림리 교회'다. 1904년 미국 남장로회 유진벨 선교사의 임시사택에서 200여 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리면서 출발한 양림리 교회는 이듬해 유진벨 선교사가 1대 담임목사로 북문안 사창골(구 한국 군대의 무기고 및 훈련원 터)에 교회 처소를 확보해 목조 50여 평 건물을 건축했다.

유진벨 선교기념관 전시실엔 첫 예배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하늘에서는 축복의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택을 지을 때 구경 오는 사람들에게 사전 홍보를 많이 했고, 성심껏 초청도 했지만 광주선교부의 가족들은, 이 뜻 깊은 날, 첫 모임에, 조선인들이 얼마나 와줄지 매우 초초히 기다리고 있엇다. 그런데 오전 11시가 다가오자 흰옷 입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양림리 언덕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오전 11시 유진벨 목사는 미닫이 문턱을 딛고서서 '땅에는 평화, 사람에겐 은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1912년 최흥종, 1916년 남궁혁 장로가 임직한 양림리 교회는 3.1만세운동을 주도하며 기독교의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로 기록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일제는 북문안교회가 3.1운동 등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고 있음을 알고 교회 터를 환수하고 예배당을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북문안교회 교인들은 양림동 오웬기념각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리면서 북문 안의 기역(ㄱ)자 예배당을 뜯어다가 남문밖에 그대로 옮겨지었다.

양림리 교회 장로였던 최흥종은 1919년 서울로 가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검거돼 1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1920년 광주청년회와 광주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하기도 했다. '광주의 아버지'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린 최흥종은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북문밖교회 초대 목사가 됐다.



기독교가 광주 3.1만세운동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제에 의해 의병과 유생 조직이 와해됐고 유일하게 조직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독교였기 때문이었다.3.1만세운동 이전부터 광주는 기독교에 의해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많이 조성돼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는 김마리아 가문과 유진벨 선교사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들어왔던 김마리아는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있었고 김규식 박사의 부인인 김순애는 광주에서 수피아야여학교 교사인 동생 김필례 부부를 만나 3.1만세운동을 촉구하는 등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1910년 6월 16일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마리아도 큰언니 김함라가 근무하던 전남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해 3.1만세운동을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여기에 에큐메니칼 정신이 강했던 유진벨과 오웬 선교사 등은 미국의 소식을 직접 접하면서 3.1만세운동에 대한 여건이 마련돼 갔다. 여기에 YMCA의 역할도 크게 작용했다. 이처럼 기독교의 영향으로 광주 3.1만세운동은 죽음을 각오한체 불길처럼 타올랐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이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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