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지역 만세운동 주역, 춘화교회
밀양지역
작성 : 2018년 07월 25일(수) 07:53 가+가-

지강 김성수 선생의 묘지. 유골은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지고, 현재는 추모비와 분봉만 남아있다.

1919년 밀양에서 일어난 4월 6일 만세운동이 시작된 춘화교회 현재 모습. 춘화교회는 201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삼일만세운동기념 역사사적지로 지정했다.
밀양시립박물관 내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는 춘화교회가 주도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설명이 나와있다. 타 종교단체가 만세운동에 참여 또는 기여한 것에 비해 기독교는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분량이 비슷하게 나열되어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춘화교회 노준남 장로와 임융식 목사.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경남 밀양까지 전파되기까지 그 중심에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김씨 가문과 춘화교회가 있었다. 당시 춘화교회 김래봉 장로(경신학교 교장·전도사)는 평양에 갔다가 독립선언문을 입수하고 김성수(당시 20세), 김응삼 영수(김성수 선생 부친·일신학교 설립자), 김응진(일신학교 교장·장로,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됨), 김영환(당시 20세, 김성수의 사촌) 등과 밀양지역 삼일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만세운동을 적극 주도한 김성수 선생은 매부인 김래봉 장로가 갖고 온 독립선언문을 학교 등사판으로 인쇄하고 태극기도 직접 만들며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4월 6일 자정, 춘화교회(당시 춘화리교회)에 모인 600여 명의 무리는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밤이 새도록 청운리 덕곡리 등 이웃동네를 오가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기세와 규모에 놀란 일본경찰은 바로 출동하지 못하고, 날이 밝고 나서야 53명을 검거했으나, 대부분 농민들이기 때문에 풀어주었다. 이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성수 선생은 일본 경찰을 피해 만주로 망명, 고향사람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서 활동하게 된다. 춘화교회 교인들이 밀양지역 3.1만세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이어간 것이다.

이후 지강 김성수 선생은 만주, 상해 등지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친다. 김성수 선생은 1933년 2월 15일 주중일본공사 암살 계획의 정보가 탄로나면서, 자신을 추적하던 일본 기관원 7명을 살해하고 도피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1937년 1월 17일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상해에서 인천으로 압송되고 황해도 해주 지방법원에서 18년 형을 받는다. 김성수 선생은 남대문형무소에서 9년째 복역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출옥하게 된다. 오랜 취조와 모진 고문에도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절개를 지켰다. 춘화교회의 설립자 가문 출신인 김성수 선생은 목숨을 걸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일들에 대해 일체 발언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민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긴 강직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업적은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증언된 것들이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다.

밀양시립박물관 내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는 춘화교회가 주도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설명이 나와있다. 타 종교단체가 만세운동에 참여 또는 기여한 것에 비해 기독교는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분량이 비슷하게 나열되어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춘화교회 노준남 장로와 임융식 목사.
밀양 지역 삼일만세운동의 또 다른 주역인 김영환 선생은 밀양애국청년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숭실대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진주 남성교회를 시무했다. 김영환 목사는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설치,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했다. 김래봉 장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경신학교의 교장이었고, 밀양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한 밀양기독청년회를 이끌며 청년 지도자로 활동했다.

춘화교회는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910년 경신학교(중등과정의 남학교)와 일신학교(중등과정의 여학교)를 설립하고 계몽운동,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밀양의 삼일운동은 민족정신으로 무장된 기독교인들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었다.

춘화교회 예배당 맞은편에 위치한 비전관은 본래 경신학교와 일신학교 건물이었다. 지금은 리모델링 후 어린이집 등 교육관으로 쓰이고 있다. 임융식 목사는 "겉과 내부 리모델링을 했지만 뼈대는 경신학교 건물 그대로"라고 설명했다. 당시 춘화교회 교인이 설립한 경신학교는 남학생, 일신학교는 여학생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내려와 춘화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간 김성수 선생을 떠올리며 노준남 장로(75세, 춘화교회 은퇴장로)는 "당시 본인은 어린 아이였지만, 김성수 선생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한다"며, "엄격하고 강직한 성격인데다가, 8년간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입가에는 인두로 지지는 가혹한 고문을 받은 흉터가 남아 있어 어린이가 보기에 매우 무서웠다"고 회상했다.

춘화교회 인근에는 김성수 선생의 생가 터가 남아있으며, 묘지도 있다. 유골은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진 상태였지만, 그를 기리기 위해 분봉과 기념비는 남아 있다.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 전해진 복음을 받아들인 최경수 씨(김희복 씨의 부인)가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1897년 춘화교회가 태동했다. 교회는 유교와 불교가 왕성했던 밀양 지역에 강인한 뿌리를 내리고 어두운 시대 민족을 위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는 당시 밀양 지역에서 9차례나 일어난 삼일만세운동과 조선의열단 활동 등이 소개되어 있다. 밀양을 넘어 경남지역의 모 교회로서 독립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한 춘화교회와 성도들. 그러나 아직도 불교가 대세인 지역이어서 그런지 밀양 독립운동기념관 '종교활동'부스에는 "기독교인들이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었다"는 내용만이 짧게 언급돼 아쉬움이 남는다. 김성수 선생 외에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름 없이,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이끈 크리스찬들이 한국교회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가볍게 넘겨선 안될 것이다.


이경남 기자



지강 김성수 선생.1900년 경남 밀양 북면 춘화리 출생으로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대해 잘 알기 위해 일부러 일본에서 유학, 전문부 사회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광동 황포군사정치학교 병과를 졸업했다. 김구 선생 등과 활동하며 의열단 작전참모로 활동했다. 침착하고, 과묵하며, 정직한 성품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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