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부모와 입양아동, 그리고 입양부모
[ 현장칼럼 ]
작성 : 2018년 05월 21일(월) 19:08 가+가-
'입양삼자'의 애도에 공감 먼저 이뤄야
이번 칼럼에서는 기독교의 입양이해에 대해서 살펴보겠다고 지난 칼럼에서 말씀드린 바 있다. 이 주제는 조금 뒤로 미루려고 한다. 양해를 청한다.

일반 독자들에게 입양 문제는 낯설고 뜬금없는 주제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입양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에게는 입양은 갑론을박이 오가는 뜨거운 감자이다. 갑론을박의 상황에서 요청되는 바는 핵심 용어에 대한 합의 혹은 공통분모의 상호 확인이다. 입양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경험하는 사람들마다 서로 달라서 충돌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공통분모의 확인을 위한 조용하고 차분한 대화를 통해서만 수습될 수 있을 것이다. 상호 이해를 찾아가는 조용하고 정감 깊었던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위에서의 대화처럼! 숲속의 새들조차 기뻐하지 않았던가.

입양이라는 말이 의미들이 담겨 있는 커다란 주머니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세 개의 작은 주머니들이 들어 있다. 입양에 연루되는 당사자가 셋이라는 말이다. 친생부모와 입양아동과 입양부모가 그들이다. 이를 입양삼자(Adoption Triad)라고 말한다. 우리가 입양이라는 말을 발화(發話)할 때, 거기에는 이 세 당사자의 경험과 인생의 여정이 깃들어 있는 말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소중히 보듬어 안아야 한다. 셋 중 어느 한 당사자도 배제를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난 칼럼에서 입양의 결정적인 본질 중의 하나가 '이별과 상실'이라고 이야기했다. 한국 입양제도의 구성과 실천과정에서 입양인 당사자들과 친생가족의 인생 경로에 깃든 '이별과 상실'에 대한 이 발화(發話)는 애도(哀悼)를 요청하는 발화이기도 하다. 제도의 층위에서 볼 때 입양이 산업화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입양은 사랑이다' '입양은 행복이다'라는 슬로건들이 진실의 한 부분을 담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별과 상실'의 아픔은 외면하고 슬픔은 억눌러야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애도의 공간을 사회바깥으로 밀어내었다. 개별적으로 입양부모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산업화된 입양기관들의 실천과 정부의 가족복지제도의 설계라는 층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입양이라는 말에 깃든 애도의 주인은 입양아동과 친생부모와 입양부모이다. 입양이란 말의 커다란 주머니 안에는 이렇듯 입양삼자의 눈물주머니 셋이 서로에게 품을 내어주면서 살고 있다. 입양부모는 이별과 상실의 직접 경험자는 아닐 수 있어도 입양자녀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는 가운데 애도에 들어간다. 전문가들은 입양부모의 입양자녀의 이별과 상실에 대한 진정어린 공감과 애도 없이는 입양아동과의 두터운 애착관계에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입양 자녀의 이별과 상실에 대한 공감 안에서 입양부모는 애도하는 분들이 된다. 따라서 이 분들은 이러한 애도 안에서 친생부모들의 '이별과 상실'의 슬픔에도 깊은 연민에 들어가게 된다. 애도가 입양삼자의 중핵적 공통 경험이라는 점이 상호 확인되면 입양 담론의 세계에서 일고 있는 우리사회의 울렁증을 얼마간 수습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진정한 애도에는 배제와 다툼을 넘어서는 이해와 연민, 용납과 연대를 불러내는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도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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