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쟁이 목사
[ 목양칼럼 ]
작성 : 2018년 05월 02일(수) 17:31 가+가-
지금은 서울 목동에서 목회를 하고 있지만 하와이에 목회할 때가 기억에 떠오른다. 휴가를 내서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 밴프라는 곳에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아내가 록키 마운틴(Rocky Mountain)의 풍경을 보면서 "이곳이 너무나도 멋있는데, 여기에 와서 살면 좋지 않겠느냐?"고 이야기를 건네 온 적이 있다. 그러나 만약에 캐나다에 살고 있던 분이 하와이에 여행을 왔다면 뭐라고 했을까? "와, 세계인이 일생에 와보고 싶어하는 매직 아일랜드인 하와이에 와보니까 여기에 살고 싶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였으리라.

목회자의 길을 가는 저에게 개인적으로 매직 아일랜드와 같은 만남, 곧 천국을 조성해가는 진기명기한 만남이 있었다면 그것은 산돌교회와의 만남이었다. 1990년 산돌교회가 종로구 충신동에서 목동 신시가지로 장막터를 옮겨서 새로운 복음의 역사를 시작할 무렵에 저의 목회에 있어서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 일어났는데 산돌교회를 만난 것이고, 담임목사이셨던 윤용일 목사님을 만난 것이었다.

산돌교회로 부임할 때에 아들이 생후 6개월이었고, 교회에서 자라나면서 담임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첫돌이 지났을 무렵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수요저녁 예배를 마치고 아들을 찾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가만히 보니까 교회 건너편 가게에서 한손은 담임목사님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분유 1통과 새우 과자와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봉지를 들고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그 순간에 온 몸이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전율을 느꼈었다.

왜냐하면 1년 임시직과 같은 초랭이 교육전도사의 아들 손을 잡고 과자와 분유를 손에 들려서 걸어 나오는 담임목사님의 모습에서 저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아, 저런게 목회이구나. 나도 후배 목회자들에게 저런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담임목사님은 신대원 졸업 후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던 저에게 규정에도 없던 학비를 장로님들과 결의를 해서 지원해주시는 바람에 공부도 잘 마쳤고, 아울러 이민 목회를 할 수 있는 길도 열려서 이민자들을 섬기는 목양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교역자로 섬기던 산돌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면서 결심하게 된 것이 있었는데, 필자에게 목회를 보여주셨던 윤용일 담임목사님의 목회적 가르침을 따라서 후배 목회자들의 사역을 위해서 신대원생은 전액 학비를 지원해주는 것을 교회가 결의했고, 부목사들도 상급 과정을 공부하도록 독려하고 그 학비를 일정정도 충당해 주는 편제를 갖추고 교역자들을 섬기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언가를 우쭐거리면서 드러내려 함이 아니라 목회 초년병 시절에 나와 내 아들을 보듬어 주시면서 목회의 한 수를 가르쳐주셨던 담임목사님의 진중한 교훈이 오늘의 목회 현장을 섬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싶어서인 것이다.

1993년 4월 21일에 산돌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어쭙쟎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수종자로 살아갈 비전과 소망을 가지도록 목양의 못자리를 만들어주신 윤용일 목사님을 만난 것이 저의 목회에 생수와 같은 만남이었다. 그 목양의 풋풋한 정신과 가르침이 현실 목회를 섬기는 저에게 각인 되었고, 하나님의 섬세한 디자인 속에 오늘도 목사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제 후로는 후배 목회자들에게도 목회자의 고결한 면모를 묵묵히 보여주고 현시해가면서 목양의 텃밭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목사로 서 있어야 하리라는 소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으려고 한다. 30여 년 전 보여주신 선배 목사님을 따라하는 따라쟁이가 목사가 되고 싶다.

김강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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