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분열은 악이다'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작성 : 2009년 05월 08일(금) 09:18 가+가-
(16) 칼빈의 연합운동

칼빈은 분리주의자였는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를 나누고 찢으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개혁자들에게 분리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당시 유력한 추기경이었던 야코포 사돌레토는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선 제네바 의회에 보낸 편지에서,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갈기갈기 찢으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네바도 이제 소위 개혁자라는 이들의 꾐에서 벗어나 다시 로마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로마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은 교회의 일치를 교란시키는 분파적 행동이고, 개혁자들은 분리주의자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공격에 대해 칼빈은 어떤 논리로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는가? 칼빈은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함으로써 자신이 로마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성과 필연성을 강조했다. 만일 로마교회가 참된 교회라면 어떤 분리나 이탈도 정당화될 수가 없다. 그러나 칼빈에 따르면 당시의 로마교회는 거짓 교회였다. 참된 교회의 표지는 말씀과 성례인데, 로마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졌고, 세례와 성찬의 참된 의미도 훼손되고 뒤틀려졌다. 때문에 성서의 가르침에 합당한 참되고 순수한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개혁운동은 결코 분파주의적인 행동이 아니라 허물어진 교회를 재건하려는 회복 운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자신은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위해 로마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분명 칼빈은 '니케아신조'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인" 교회를 믿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주저인 '기독교강요' 중 교회론을 다룬 제4권의 제일 첫 부분에서 교회의 일치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여기에 한 가지 대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그 교회가 참된 교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참된 교회로부터의 분리는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악한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교회일치 운동에서 칼빈의 원칙
참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출발한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내적인 분열을 겪게 되자 칼빈은 나름의 에큐메니칼 원칙을 가지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첫째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교회와는 언제든지 연합하고자 하였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순수한 말씀 사역과 순수한 성례전 거행", 이 두 가지 표지가 있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불렀다. 그는 교회의 두 표지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그 공동체에 다른 사소한 여러 오류들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이유로 교회의 일치를 깨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이처럼 말씀과 성례라는 교회의 표지는 칼빈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둘째로 칼빈은 교리 중에서 본질적인 교리와 비본질적인 교리를 구분함으로써 교회일치를 위한 여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칼빈은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불화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우리의 구원에 결정적인 교리, 즉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는 신앙의 근본적인 조항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어서 안되지만, 그렇지 않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는 서로간의 차이를 용인하고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칼빈은 예배에서 촛불을 사용할 것인지, 어떤 색깔의 포도주를 사용할 것인지, 유교병과 무교병 중 어떤 것을 사용할 것인지, 침례를 행할 것인지 물을 뿌릴 것인지 등과 같은 문제들은 각 교회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비본질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칼빈은 이와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들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거나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셋째로 칼빈은 대립적인 견해들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교회일치를 유지하려는 현실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성만찬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지도자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서 중도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양측의 연합을 추구했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의 중도의 길이 아무런 원칙 없는 타협은 결코 아니었다. 칼빈은 교회의 표지나 본질적인 교리로 대표되는 말씀의 진리가 교회일치 운동의 시작과 끝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진리는 교회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에,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것이었다.

교회일치를 위한 칼빈의 실천
칼빈은 자신의 에큐메니칼 사상과 원칙에 입각해 16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일치를 위해 자신의 표현처럼 "말과 행동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이미 언급한대로 그는 루터주의자들과 츠빙글리주의자들의 화해를 위해 직접 나서서 양쪽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고, 찾아가고, 협상을 벌였다. 칼빈이 성만찬에 관해 쓴 글들에는 이런 그의 헌신과 노력이 고스란히 배여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잉글랜드 교회와도 연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라면 감독 제도까지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52년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자 토마스 크랜머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일치를 의논할 모임을 갖자고 제안했을 때, 칼빈은 이 일을 위해서라면 "열 개의 바다라고 해도 기꺼이 건너갈 것"이라고 답장했다. 이 답장에서 칼빈은 자기 시대의 가장 큰 악들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분열이라고 한탄하면서, 만일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이리저리 찢겨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이를 방관한다면 무거운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잉글랜드에서 1553년 피의 메리가 즉위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교회일치를 이루기 위한 보편 공의회 소집에 대한 칼빈의 관심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는 복음적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의 연대를 추구했다. 뇌샤텔, 프랑크푸르트, 런던, 동(東)프리슬란트 같은 지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칼빈은 편지를 쓰거나 사람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서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조국인 프랑스는 물론이고 체코의 후스파, 이탈리아에서 박해받던 발도파와도 연대하면서 그들을 도왔다. 이런 모든 활동들은 칼빈이 16세기 당시 얼마나 교회일치를 추구한 지도자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교회를 위한 칼빈의 유산
최근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펴낸 '칼빈'이라는 책에는 "분열은 한국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현저한 특징"이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한국의 장로교회가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어떤 외국 학자가 한국에서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운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것이 외국 학자들의 눈에 비친 한국장로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깝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아버지인 칼빈이 오늘 한국장로교회의 모습을 본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쩌면 도무지 나와는 상관없는 교회라고 할지도 모른다. 분열의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장로교회가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선교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회일치를 적극 모색할 때이다. 주님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박경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 미국 Claremont 신학교(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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