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신학 벗어나 세계 선도할 신학자 양성해야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작성 : 2009년 02월 25일(수) 16:29 가+가-
   
▲ 국내의 대표적 칼빈주의자들

서구신학자들은 이른바 제3세계의 신학을 가리켜 '화분갈이 신학' '수입신학' 또는 '번역신학'이라고 한다. 그 만큼 제3세계의 신학이란 아직도 독자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없고 주로 번역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누가 누구에게서 배웠고 누구의 작품을 번역했는가에 따라서 신학적인 입장도 신앙적인 입장도 달라지게 된다.
 
한국교회에도 칼빈을 연구한 학자와 칼빈주의자들이 많이 있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아직은 '번역신학'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다. 또 칼빈 학자라고 해도 모두 칼빈주의자라고 하기도 어렵고 꼭 같이 칼빈을 논한다고 해도 그가 가진 신학적인 배경과 입장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서 누가 칼빈 연구가인가 하는 것의 객관적인 잣대로는 그가 쓴 논문이나 책으로만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과 논문보다 칼빈의 사상과 삶을 모델로 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위해서 살아간 분들도 적지 않다. 또 칼빈을 연구한다고 해도 딱히 칼빈만을 연구한 학자라기보다, 교회사와 교의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칼빈을 제외하고 신학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학을 하는 학자들도 칼빈의 주석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실천 신학자들도 목회자이면서 강해설교의 왕인 칼빈의 모습을 반드시 말해야 될 것이다.
 
사실 칼빈은 불후의 명작 '기독교강요'를 비롯해서 '성경주석' '설교집' '서간집' '논문집' 등 크게 다섯 종류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 중에 어느 특정한 주제를 연구한다면 모두 칼빈 연구가로 존중되어야 하며, 모든 연구가들은 서로 배우고 협력하는 것도 중요하리라고 본다. 이런 전제를 바닥에 깔고 한국교회의 칼빈 또는 칼빈주의 인물들을 주마간산식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에 칼빈은 언제 소개되었을까? 그것은 1916년 기독신보(基督申報)였다. 그 해 11월 29일에 시작해서 1917년 6월 20일까지 약 7개월 동안 연재되었다. 그 시대는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생긴지 10년 남짓 되었고 아직도 평양신학교 신학 잡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이 창간되기 2년 전에 이렇게 장문의 칼빈이 소개가 된 것은 큰 축복이었다. 저자는 자기 이름을 숨기고 그냥 '시온산인'이라고 했는데 이 글은 일본인 마쓰나가 후미오(松永文雄)목사의 글을 번역했다고 썼다. 그 때 요한 칼빈을 '갈빈약한(葛貧約翰)'이라 표기했다. 아마 목사이면서 일본어를 잘 할 줄 아는 분이었을 것이다.
 
1924년 감리교 신학잡지인 신학세계(神學世界)에 김인영이 '종교개혁가 요한 칼빈'이란 글을 발표했다. 그는 전기 작가로서 칼빈에 대한 개략적인 스케치를 하고 있다. 당시 신학세계와 신학지남의 필자는 서로가 넘나들면서 글을 썼다. 그 대표로 1916년 신학세계 창간호에 평양신학교 교장인 마포삼열박사가 '평양장로회신학교 약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1934년은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논쟁이 일어났을 때 평양장로회신학교 잡지 '신학지남'에 칼빈 특집을 실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칼빈 특집을 만든 것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변증의 기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만 때 마침 칼빈 탄생 4백25주년 기념 특집이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선교 50주년에 와서야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에 대해서 약간의 눈이 열리고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한국인 신학자인 남궁혁박사는 '칼빈 신학과 현대 생활'에서 △칼빈신학 △칼빈신학과 교회생활 △칼빈신학과 정치생활 △칼빈신학과 예술 △칼빈신학과 내세 등을 들면서 칼빈의 신학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리고 송창근목사는 '요한 칼빈의 일생'을 썼다. 특히 박형룡박사는 조직신학자답게 '칼빈의 예정론'를 썼고, 이 방면에 처음으로 교리적으로 논한 글이었다. 그는 여기서 이른바 '칼빈주의 5교리'를 말하면서 인간의 전적 무능, 무조건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적 은혜, 성도의 견인을 열거했는데 그 글에는 어느 교리이든지 예정의 교리와 관계없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37년에 박형룡박사는 미국의 개혁주의학자인 로레인 부트너박사의 칼빈예정론(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을 번역했다. 이 책은 칼빈주의 입장에서 예정론을 다룬 최초의 번역서이기도 하지만, 개혁주의가 곧 칼빈주의와 같은 뜻으로 이해했고, 이 책 때문에 아직 칼빈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대에 칼빈주의가 곧 예정론처럼 한국교회에 굳어지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칼빈주의 운동의 또 다른 큰 별은 1950년 이후 고려신학교 파숫군(把守軍)지를 중심한 박윤선박사의 칼빈주의 운동이다. 1945년 해방 후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교수하던 박형룡과 박윤선 두 교수가 귀국하여 고려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특히 박윤선박사는 '파숫군' 잡지를 통해서 칼빈신학과 칼빈주의 세계관을 끊임없이 써 갔고, 그리고 그의 주석 전편에 칼빈주의적 성경해석과 세계관을 실었다. 그런데 초기의 박윤선박사의 칼빈주의 세계관도 실은 헨리 미터의 칼빈주의를 요약 발췌한 것이었고 후일 번역판이 나오기도 했다. 박형룡박사, 박윤선박사 등은 칼빈주의를 많이 말하고 그의 저서들에 수 없이 많은 칼빈과 칼빈주의를 인용하지만 그 자신이 칼빈학자는 아니었다.
 
이와 같은 때에 1950년에 김재준박사는 파커(T. H. L. Parker)의 '칼빈의 모습'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1956년에 이병섭목사는 데이큰(A. Dakin)의 '칼빈주의'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이로 보건데 선교 초기에서 196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칼빈 연구와 칼빈주의 연구는 몇 안 되는 학자들이었고 그나마도 번역에 의존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1963년 한경직목사를 회장으로 이종성박사가 총무 겸 서기를 맡아 이른바 '한국칼빈신학연구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1965년 '칼빈 서거 4백주년 기념 논문집 p. 132'을 발간 한 후에 20년 동안 거의 학문적 활동이 없었다. 그 후 1985년에 한철하, 이수영, 정성구교수 등이 중심되어 다시 '한국칼빈학회'를 다시 세웠다. 1960년에 이종성박사가 커(H. T. Kerr)의 '기독교 강요선'을 비롯해서 각 출판사에서 비로소 기독교강요를 번역해 냈으나 섭섭하게도 대개의 번역들은 일본어에서 중역한 것들이었다. 1980년대에 와서부터 한국교회에서는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번역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훌륭한 젊은 칼빈학자들이 해외 명문학교에서 귀국해서 속속 각 신학 대학에서 그리고 칼빈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양질의 저서와 논문들을 써내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의 칼빈 연구는 이제부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약 25년 동안 한국의 칼빈학자들이 국제칼빈학회와 아시아칼빈학회 등에 참석해 국제적인 흐름을 읽기도 하고 특히 한국칼빈학회에서 '칼빈연구'란 잡지에서 무게 있는 논문들을 발표하는 것으로 봐서, 이제야 비로소 한국의 칼빈 및 칼빈주의 연구가 막 출발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희망이다.
 
지금까지는 모두 번역 신학자들이 한국에 칼빈 연구를 위해 기초를 놓았던 분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 날 열악한 연구 환경과 일차 자료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쏟은 선배 학자들이 비록 번역 수준의 칼빈 또는 칼빈주의 연구를 했지만, 한국 칼빈신학을 위한 기초를 닦고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칼빈 탄생 5백주년을 기점으로 이제는 번역 수준에서 뛰어 넘어 세계교회의 칼빈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정 성 구
 ▲ 칼빈대 석좌교수(칼빈주의와 실천신학)
 ▲ 암스텔담 Vrije대학교 (Drs.Theol.)
 ▲ Whitefield대(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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